"김정남 암살한 두 여성은 북한이 짠 '장기판 말'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7.30 16:19

업데이트 2021.07.30 16:48

2017년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벌어진 김정남 암살 사건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암살자들'. 사진의 네모 속 남자가 암살 당일 공항 CCTV에 포착된 김정은 북한 최고 지도자의 이복형 김정남의 사건 직전 모습이다. [사진 더쿱, 왓챠]

2017년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벌어진 김정남 암살 사건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암살자들'. 사진의 네모 속 남자가 암살 당일 공항 CCTV에 포착된 김정은 북한 최고 지도자의 이복형 김정남의 사건 직전 모습이다. [사진 더쿱, 왓챠]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한 남성에게 두 여성이 재빠르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만지곤 도망친다. 당황한 남성은 공항 경찰 도움으로 응급처치를 받지만 한 시간 만에 사망한다. 공항 진료실 소파에 링거를 꽂은 채 축 늘어진 남자, 바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다. 김정남의 모습은 폐쇄회로카메라(CCTV)에 적나라하게 잡혔다.

美다큐 '암살자들' 화이트 감독
김정남 피살 사건 용의자 조명
"FBI에 상담…다리 뻗고 못자
암살 이면의 두 여성 인생 봐주길"

다음달 12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암살자들’은 4년 전 김정남 피살 사건을 2년여간 추적해 재구성한 작품이다. 다큐를 만든 미국 감독 라이언 화이트(40)는 김정남에게 화학 독극물을 발라 살해한 두 명의 젊은 여성에 주목했다.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이하 시티)와 베트남인 도안 티 흐엉(이하 도안). 암살 순간 CCTV에 얼굴까지 드러난 이들은 공항에서 손을 씻고 사라진 모습이 또 다른 CCTV에 포착돼 사건 용의자로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무방비로 붙잡힌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몰래카메라 영상에 배우로 고용됐던 것이라며 암살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정말 북한에 이용당한 순진한 하수인일까,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들일까.

"거짓이건, 진실이건 따라가 보고 싶었죠" 

다음달 12일 개봉하는 다큐 '암살자들' 라이언 화이트 감독 화상 간담회가 28일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렸다. [사진 더쿱, 왓챠]

다음달 12일 개봉하는 다큐 '암살자들' 라이언 화이트 감독 화상 간담회가 28일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렸다. [사진 더쿱, 왓챠]

28일 화상 간담회에서 한국 취재진을 만난 화이트 감독은 “거짓말이건, 진실이건 한번 따라가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서 “정치적 암살 이야기지만 용의자였던 여성들의 인생과 본질에 좀 더 주목하고자 했다”고 했다.

작품을 만든 계기는.  

“2017년 2월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첫 달이었기 때문에 모든 헤드라인이 그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은 짧은 시간 굉장히 주목받았다. 미국에선 암살 사건 이후 이야기를 잘 몰랐는데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에서 활동하는 탐사 보도 저널리스트 더그 복 클라크가 2017년 말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내고 내가 전혀 몰랐던 내용을 들려줬다. 이 여성들이 정말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다큐멘터리로선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화이트 감독은 비틀스 팬클럽 회장을 중심으로 비틀스를 광범위하게 회고한 ‘프레다, 그녀만이 알고 있는 비틀스’(2013), 캘리포니아 동성혼 금지에 맞선 투쟁을 5년 넘게 담아 선댄스 감독상을 받은 ‘더 케이스 어게인스트 8’(2014) 등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다큐로 이름난 터. 그의 네 번째 장편 다큐 ‘암살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암살 벌어진 공항 CCTV 1000시간 넘게 분석 

그와 제작진은 김정남 피살사건 후 2019년까지 이어진 말레이시아 현지 재판 과정에 더해 사건 전후 1000시간에 달하는 쿠알라룸푸르 공항 CCTV 등 검찰 측과 변호인단 증거들을 분석하고 시티와 도안의 친구, 가족까지 만나며 점점 시티와 도안이 ‘장기판의 말’이라는 결론에 다가선다. 그 ‘판’을 짠 북한 사람들이 사건 당일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유유히 출국하는 CCTV 영상을 다큐에서 보여주면서다.

시티와 도안의 변호사들과 긴밀히 협조하며 촬영했는데.  

“처음에 내가 말레이시아에 갔을 땐 현지 법조계‧수사당국‧언론 거의 모두가 두 여성이 유죄를 받고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변호인들은 공개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내 다큐가 용의자들이 무죄일 가능성을 전 세계에 알릴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화이트 감독은 “처음엔 유죄라고 생각했지만 1년 이상 촬영하는 동안 무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두 여성이 무죄라고 믿게 된 계기는.  

“변호사가 주는 전체적인 증거들과 그들의 휴대폰 메시지, 왓츠앱, 페이스북, (암살계획을 몰래카메라 촬영으로 위장한) 북한 사람들과 대화한 내용 수천 장을 직접 봤다. 재판 과정에서도 이 여성들이 실제 이것(암살)에 대해 알았는지 입증할 만한 증거 자체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검사와 판사는 두 여성이 (독극물이란 것을 알고) 손을 씻었다, 도안이 굉장히 CCTV에 공격적으로 보였다고 지적했는데 북한 사람들과 메시지를 보면 (몰카 촬영) 조건으로 손을 씻으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CCTV에서 보인 행동도 의도를 갖고 살인했다는 증거로 볼 수 없었다.”

김정남 암살 사건 당시 1000시간여 공항 CCTV 속엔 용의자로 지목된 여성들의 암살 사건 전후 모습도 담겼다. [사진 더쿱, 왓챠]

김정남 암살 사건 당시 1000시간여 공항 CCTV 속엔 용의자로 지목된 여성들의 암살 사건 전후 모습도 담겼다. [사진 더쿱, 왓챠]

다큐를 찍으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두 여성이 이 영화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제가 다큐를 찍고 있는데 참여해주면 좋겠다고 접근하는 것이 그들에겐 ‘몰카’를 함께 찍지 않겠냐는 제안으로 이 사건에 처음 연루됐던 순간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또 전체적인 CCTV 영상들을 보는 게 어려웠다. 사건 당일 해외 매체를 통해 일부 화면이 유출됐지만 전체 푸티지는 공개되지 않았었다. DVD 수십 장에 달하는 1000시간 분량을 촬영팀과 몇 달에 걸쳐 살펴봤다. 시티와 도안, 북한 사람들, 그날 운전을 해준 택시기사 등 7명 정도 사람들의 동선을 확인하며 타임라인을 짜는 절차가 오래 걸렸다.”

다큐엔 정부 간 논의로 사태가 급변하면서 2019년 초 시티가 갑자기 석방되는 순간도 담겼다. 화이트 감독은 “인생에서 가장 놀랐던 순간”이라 꼽았다. “말레이시아는 판사가 유무죄 판결의 전적인 권한을 갖는데 두 여성에게 변론을 준비하라고 했을 때는 무죄라는 뉘앙스가 하나도 없었다”면서 “판사도 놀랄 정도였다. 도안도 비슷하게 석방됐다”고 돌이켰다.

희대의 정치적 암살 사건으로 출발한 영화는 아시아 이민자 여성들의 취약한 처지와 아시아의 외교적 관계, 미디어와 대중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뻗어 나간다. 또 두 여성을 이용한 암살사건 후 북한이 입은 타격은 없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된 영화는 비평 전문 사이트 로튼토마토 언론‧평단 신선도 98%, 메타크리틱 평점 74점(100점 만점)을 받았다. “인스타그램 세대를 위한 존 르 카레 스릴러 같다. 이것은 진짜다”(타임스) “인도네시아·베트남 이민자 체포를 정치적 부패에 대한 비유로 해석했다”(옵저버) 등 호평이 많다.

"누군가 김정남 아들 영화 만들어주길"

그럼에도 개봉까지 쉽지 않았다고 화이트 감독은 말했다. 2014년 미국 소니픽처스가 북한 최고 지도자 김정은과 북한 상류층을 풍자한 미국 B급 코미디 영화 ‘디 인터뷰’ 개봉 후 해킹과 테러 위협을 받은 사건을 짚으면서다. “그 사건으로 북한이나 정치적 이슈에 대해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했다.

“북한에 직접적인 신체적 위협을 당하진 않았지만, 휴대폰‧노트북 등 IT 기기에 대해 조심했고 소니 해킹 사건을 담당했던 FBI팀에 컨설팅을 요청했다”는 그는 “두 다리를 뻗고 잘 자지 못했다. 항상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2년 동안은 불편함을 감내했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에도 분명 추적당할 거라며 그만두란 얘기를 들었다. 특히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고 했다.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지났다”면서 “끝났을 때 어머니가 가장 기뻐했다”고 했다. “북한에선 그 어떤 반응이나 답변도 아직은 없었다”고 했다.

암살 사건 이후 용의자로 지목된 두 여성 중 도안 티 흐엉이 재판 과정에 참여한 모습이다. 다큐 '암살자들'에도 담겼다. [사진 더쿱, 왓챠]

암살 사건 이후 용의자로 지목된 두 여성 중 도안 티 흐엉이 재판 과정에 참여한 모습이다. 다큐 '암살자들'에도 담겼다. [사진 더쿱, 왓챠]

차기작은 15년간 화성에 남겨진 로봇에 관한 다큐멘터리 ‘굿 나잇 아피’다. “정신건강을 위해 조금 가볍고 재밌는 프로젝트를 택했”단다. 그는 북한 관련 후속작 계획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대신 누군가 만든다면 김정남 아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줬으면 합니다. 암살 사건 후 사라진 아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번 다큐엔 두 여성과 관련이 없어서 넣지 않았죠. 김정남 암살 후 그의 장남이 김정은의 정권에 위협이 될지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 있는 다큐 제작진이 따라간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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