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인사이드]‘6·25전쟁’ 미국처럼 대규모 병력 파병하고도 잊혀진 국가

중앙일보

입력 2021.07.30 11:00

1951년 6월 한강 북단에서 작전 중인 제65연대 병사들. 푸에르토리코는 미군에 속했지만 대부분이 영어를 하지 못해 지휘 통솔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 wikipedia

1951년 6월 한강 북단에서 작전 중인 제65연대 병사들. 푸에르토리코는 미군에 속했지만 대부분이 영어를 하지 못해 지휘 통솔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 wikipedia

6·25전쟁 당시에 대한민국을 도우려 5개국에서 의료지원단을 보냈고 19개국에서 물자를 지원했다. 그런데도 전투병을 보낸 16개국을 많이 언급하는 이유는 직접 전투를 벌였고 고귀한 희생도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시민권 갖지만 미국은 아닌 나라
대규모 전투병 파병했지만 기억 못해
흥남 탈출에서 결정적인 공적도 세워

이들 국가에서 많은 사람이 평생 들어본 적 없는 한국에 와서 죽거나 평생을 지고 갈 상처를 입었다.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예도 부지기수다. 16개국은 연인원 180만여 명을 참전시킨 미국에서부터 총 89명을 보낸 룩셈부르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공식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16개국 외에도 한국에 대규모 전투병을 파견한 나라가 하나 더 있다.

6000여 명으로 편성된 1개 보병 연대를 파병했는데 규모로는 미국·영국 다음이었다. 연인원 6만여 명은 오히려 연인원 5만 7000여 명을 파병한 영국보다 많았다. 총인구 대비 파병 병력 비율 또한 공식적으로 가장 높은 룩셈부르크보다 무려 30배 이상이나 많은 엄청난 수준이다.

그러나 정작 그 나라가 우리를 도와주었는지 아는 이들은 드물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파병국은 나라이면서도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미 카리브해에 있는 푸에르토리코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룩셈부르크 현지에 위치한 6ㆍ25전쟁 참전기념비. 룩셈부르크는 총 89명을 파병했으나 인구 대비로 비율이 가장 높은 참전국이다. 푸에르토리코는 이보다 30배나 높은 비율의 병력을 참전시켰다. 사진 koreanwarmemorials.com

룩셈부르크 현지에 위치한 6ㆍ25전쟁 참전기념비. 룩셈부르크는 총 89명을 파병했으나 인구 대비로 비율이 가장 높은 참전국이다. 푸에르토리코는 이보다 30배나 높은 비율의 병력을 참전시켰다. 사진 koreanwarmemorials.com

푸에르토리코는 1898년 미·서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할양받은 후 1917년 준주(準州)를 거쳐서 1952년 자치령이 됐다. 인구는 300만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곳에서 출생하면 미국 시민권자로 대접받지만, 권리와 의무는 일반 미국 시민과 조금 차이가 있다.

미 대통령 선거인단이나 연방 의원은 배정되지 않는 등 선거에 참여하지 못한다. 올림픽 같은 국제 행사에는 독자 참여하며 별도의 국기와 국가를 사용한다. 그래서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쪽과 미국의 한 주로 편입하자는 주장이 상존한다.

그러한 푸에르토리코가 6·25전쟁에 참전했었다. 그것도 미국 이외 여타 참전국보다 훨씬 많은 대규모 병력을 한국에 보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자원병이다.

정찰 중인 제65연대 C중대 병사들. 푸에르토리코는 참전 초기에 낯선 혹한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고생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 wikipedia

정찰 중인 제65연대 C중대 병사들. 푸에르토리코는 참전 초기에 낯선 혹한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고생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 wikipedia

미 육군 제65연대는 1898년에 푸에르토리코 자원병으로 창설한 부대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모든 미군 중에서 가장 먼저 실전 투입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유럽 전선에서 활약했다. 이렇듯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제65연대가 태평양을 가로질러 1950년 9월 23일 부산에 도착했다. 한마디로 당시에 미국이나 미국령에서동원 태세가 완비된 몇 안 되던 정예부대다.

이들은 미 제3사단에 배속돼 북진 공격에 참여했다. 한국 도착 후 원산 일대에 투입되었는데 미 해병 1사단으로부터 작전 구역을 인계받은 1950년 10월 말이 되자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1950년 11월 미 해병대원들이 장진호 서쪽 유담리, 덕동 고개 근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모습. [사진 플래닛미디어]

1950년 11월 미 해병대원들이 장진호 서쪽 유담리, 덕동 고개 근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모습. [사진 플래닛미디어]

성큼 다가온 북한의 겨울이 카리브해 지역에서 살아왔던 병사들에게는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 다가왔다. 바로 그때 중공군의 공격으로 원산 일대가 함락되면서 퇴로가 차단되자 제65연대는 흥남으로 퇴각했다.

6·25전쟁 당시에 제65연대가 입은 피해 중 대부분은 이때 발생했는데 100여 명의 실종자도 생겼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진호에서 탈출한 미 해병 1사단을 엄호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마지막까지 항구를 확보해줘 10만여 명에 이르는 미 10군단, 국군 1군단 그리고 9만여 명의 피난민들이 안전하게 사지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재북진이 시작되었을 때 모든 아군 부대 중에서 가장 먼저 한강을 도하하기도 했다.

푸에르토리코는 이후 휴전 할 때 까지 주로 중부 전선 일대에서 작전을 벌였고 1951년 7월에는 717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2개 연대를 궤멸했다.

이처럼 6·25전쟁 당시에 푸에르토리코는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해 열심히 싸워주었고 756명의 고귀한 젊은이들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런데도 단지 미군에 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그들의 무공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고마웠던 17번째 파병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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