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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인왕제색도’가 전통시장 매대 위에 걸리지 않으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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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정확한 문법으로 기재할 것.” 이건 이 칼럼, 즉 중앙시평의 필자에게 신문사에서 보낸 주의사항이 아니었다. 어떤 공공기관에서 보낸 요구사항이었다. 그 문장의 앞뒤를 풀어쓰면 이렇다. 긍정문으로 알기 쉽게 서술해야 하며 문장 내용은 간단명료하고 불필요한 낱말이나 구절은 피하고 예측보다는 직설적으로 기술하되 이해하기 쉽고 혼돈을 야기하지 않도록 구두점을 사용해야 하며 상투적인 표현의 반복사용이나 틀에 박힌 문구는 피할 것.

유사사례 따라 공공건물 예산 책정 #수준 낮은 공공건물 악순환의 근원 #유례없는 건물 요구 이건희 컬렉션 #공공건물 향상의 새 기준점 되어야

대입 논술고사 대비지침에 나올 법한 요구들은 막상 용역수행자 일반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대학민국 국어교육 성취에 대한 부정적 목격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문서의 진정한 문제는 문법이 아닌 어투였다. 청유·권유가 아니고 지시·명령의 문장들이었던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게 한국인의 언어감각이다. ‘명료한 문장을 사용하시오’와 ‘모호한 문장을 사용하지 말 것’은 관계 설정 전제가 다르다.

이 문서의 제목은 ‘과업내용서’였다. 이전 시대에는 ‘과업지시서’였다. 제목이 벌써 공무원이 ‘나으리’였으며 지시할 주체였던 시대를 증언한다. 계약서의 갑이라고도 불렀다. 하청업체가 협력업체로 호칭이 바뀌는 시대 따라 문서 제목도 바뀌었다. 그러나 세상은 한 번에 바뀌지는 않더라. 구글로 검색하면 ‘과업내용서’는 7만 건이되 ‘과업지시서’는 여전히 6만 건 정도 등장한다.

검색된 문서를 몇 개 다운로드해서 들여다보자. 거기에는 정확한 문장 사용 요구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는 입장들이 우글거린다. 비문은 속출하고 과업과 아무 관련 없는 조항들이 퇴적암 속 화석처럼 무심히 곳곳에 박혀있다. 도대체 왜 한국의 관공서에서는 아직도 허가와 심의를 굳이 ‘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까. 또한 그 문서들에는 을이 책임지고 응하고 따라야 할 조건들이 즐비하다. 이런 내용들은 결국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갑의 선언문이다. 나는 책임지지 않겠다.

이 책임회피의 운동장에 새로운 사건이 던져졌다. 한국 현대미술사의 최대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마땅할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 사건은 거기 걸맞는 건물을 요구하고 있는데 일단 호명하면 이건희 미술관이 되겠다. 기증된 미술품 수준에 맞춰 명품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런데 이 미술관 건립 주체가 정부기관이다. 과업지시서 내보내는 곳이다. 즉 좋은 미술관 건립의 성취보다 사업과정의 책임소재가 더 중요한 곳이다.

명품백 장만의 첫 조건은 충분한 통장 잔고 확보다. 명품백을 사겠다며 전통시장 물가자료를 뒤적이면 곤란하다. 명품 건물을 짓기 위한 조건도 같다. 기대 수준에 맞는 예산 책정. 그런데 공공건물 건립예산 세우는 기존의 방법은 명쾌하다. 우선 최근에 지은 유사 건물들 공사비를 조사한다. 그리고 단위면적당 평균값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값을 소요면적에 곱한다. 그러면 투자심사 통과 근거도 생기고 예산수립자가 감사에서 더 책임질 일도 없다. 전통시장 잡화상 매대 위의 평균 가격이 쇼핑 기준점이 되는 순간이다.

다른 방법도 있다. 과업지시서 보낼 을을 고용하는 것이다. 먼저 고용될 그 을은 청렴서약서·이행각서·보증보험납부서 등의 복잡하고 기이한 문서들부터 줄줄이 만들어 제출해야 한다. 문서만큼 철저하다면 투명성, 청렴성에서 한국은 지구상 최고의 국가가 되어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게 형식·절차·면피일 뿐이라는 게 문제다. 이렇게 복잡한 폐쇄회로 안에서 지시받는 을인들 책임지고 다른 근거를 대기 어렵다. 그들 역시 유사 사업 평균값 근처를 오가는 예산안을 제시한다. 누구도 추궁당할 우려가 없으니 용역비 받고 다 행복할 수 있다.

그렇게 예산 세워 지은 건물들은 결국 이전의 그 건물 수준만큼 허접해진다. 세상에 싸고 좋은 건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휴가에 방문한 공공미술관·도서관·기념관들이 왜 그렇게 수준이 낮은지 궁금하다면 예산과 과업지시서를 떠올리면 된다. 무능한 한국의 건축가들을 비난하기 전에.

공공기관의 과업내용서는 문자로 번역된 공공기관이다. 그 문서가 횡설수설하는 문장으로 덮여있는 것은 직원들의 국어교육 성취수준 한계 때문이 아니다. 지적과 필요에 따라 땜질해왔기 때문이다. 유사 준공건물 기반 예산책정은 감사 회피의 최고 안전장치다. 험악하고 적대적인 감사는 공무원들에게 책임회피·자리보전·복지부동의 생존전략을 강요해왔다.

이건희 회장의 재력과 선구안이 그의 미술품 수집 기반인 건 틀림없겠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그가 선택하고 판단하고 책임졌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건축가들을 불러온 리움도 그렇게 지었다. 공공기관의 발주에서도 책임질 지위에 있는 사람의 책임 자임과 적극 개입이 없다면 문서 한 장도, 예산 액수도, 건물 수준도 바뀌지 않는다. ‘인왕제색도’가 걸릴 건물이 명품이 되기 위한 첫 조건을 불필요한 낱말, 상투적 표현, 틀에 박힌 문구 피하고 직설적이고 명료하고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한 단어로 기술하면 그건 충분한 예산확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