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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선

그 많다는 집과 백신은 어디 갔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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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28일 부동산 정책 브리핑을 하는 홍남기 경제 부총리. 오른쪽은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 [뉴스1]

28일 부동산 정책 브리핑을 하는 홍남기 경제 부총리. 오른쪽은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 [뉴스1]

숫자만 있고 물건은 없다. 집과 백신 말이다. 정부가 내놓는 숫자는 차고 넘치는 데, 실체는 잡히지 않는다. 신기루 같다. 아니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에라도 걸린 걸까.

빈틈투성이 205만호 공급 계획 #백신 도입 물량은 여전히 깜깜이 #면피성 숫자놀음에 멍드는 민심

치솟는 집값에 긴장한 정부가 대국민담화를 통해 ‘구두개입’에 나선 지난 28일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은 “수도권 180만호, 전국 205만호 공급 계획을 속도감 있게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205만호는 엄청난 물량이다. 1990년 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 이후 최대다. 당시 일산·분당 등 1기 신도시의 공급 물량이 29만호였던 걸 떠올리면 대충 감이 온다.

시장에 물건이 넘치면 가격은 떨어진다. 경제의 기본 원리다. 205만호의 집을 풀겠다는데도 시장은 무반응이다. 오히려 집값은 더 뜨거워지고 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사실, 205만호는 믿을 수 없는 숫자다. 엎어질 수도 있는 후보지 물량까지 끌어모아 만들어낸 수치라서다.

205만호 중 가장 비중이 큰 2·4공급 대책(83만6000가구)만 봐도 갈 길은 요원하다. 노 장관이 “5개월 만에 12만6000가구를 공급할 수 있는 도심 후보지를 발굴했다”고 했지만 실제 추진을 위한 주민 동의를 받은 곳은 10곳(1만5000가구)에 불과하다.

공급이 확정된 3기 신도시도 희망고문이 될 수 있다. 사전청약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토지보상금 지급도 끝나지 않은 상태다. 토지보상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으면, 2023년 예정인 본청약 일정도 미뤄질 수 있다. 입주 시점이 달나라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전청약 당첨에 발목이 잡힐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본청약 때까지 무주택 요건을 유지해야 하는 데다, 삽을 뜨는 시점이 늦어지면 ‘전세 난민’으로 고난의 행군은 예정된 수순이다. 토지보상 지연으로 모든 일정이 미뤄졌던 2010년 보금자리주택의 선례도 있다.

때문에 “3기 신도시 사전청약은 물건을 언제 준다고 확답하지 못하지만 일단 계약금 내고 돈 먼저 달라는 것과 같다. 물건을 받을 시점은 5년일지 10년일지 모른다”는 말까지 나온다. ‘가상 아파트’ ‘가상 청약’ ‘신기루 분양’이라는 신조어가 속출하는 이유다.

뿐만 아니다.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해지 대신 서울 태릉골프장과 용산정비창, 서부면허시험장 등 있는 땅 없는 땅 다 긁어모아(유휴부지) 4만8000호의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계획도 좌초될 위기다. 주민과 지방자치단체의 반발 때문이다.

정부의 숫자놀음에 실체가 오리무중인 건 집만이 아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백신 물량도 깜깜이 그 자체다. 계획이 없어서가 아니다. 계획과 현실의 아득한 격차로 빚어지는 혼돈이다.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올해 백신 도입 현황과 계획에 따르면 29일 기준 확정된 올해 백신 도입 물량은 1억9300만회분이다. 화이자(6600만회분)와 모더나(4000만회분), 아스트라제네카(2000만회분), 노바백스(4000만회분) 등을 포함한 수치다. 이 중 7월까지 도입 완료된 물량은 2770만회분이다.

이후 도입 예정 물량은 8월 약 2900만회분, 9월 이후 약 1억3200만회분이다. 하지만 백신별 세부 도입 물량은 알 수 없다. 선 구매 계약에도 분기별 도입 물량 내에서 월별·주별 물량을 협의해 들여오고 있어서다.

그 결과 백신 접종은 그야말로 ‘복불복 게임’이 됐다. 백신 재고 부족에 따른 접종 중단에 이어 초유의 교차접종(1차 아스트라제네카+2차 화이자), 접종 간격 연장까지 미봉책의 대행진이 벌어졌다. 속 터지는 접종 예약 전쟁을 치른 50대 접종 대상자는 예약 백신 변경(모더나→화이자) 통보를 받았다. 모더나의 생산 차질로 이번 달 공급 예정이던 200만회분의 백신 도입이 미뤄지면서다. 들끓는 여론에 모더나와 긴급 협의에 나선 정부는 다음 주 공급 재개를 밝혔지만, 두고 봐야 알 노릇이다.

계획은 있지만 백신은 없는 상황 속에도 정부는 분기별·월별 공급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11월까지 집단면역 형성을 목표로 9월까지 전 국민의 70%인 3600만명에 대한 1차 접종을 완료하겠다고 강조한다. 29일 현재 완전 접종을 마친 인원은 전 국민의 13.7%에 불과하다. 1차 접종률은 35.8%다.

부족한 집, 모자란 백신에 편치 않은 국민의 심기를 면피성 숫자놀음으로 달래려는 건 비겁하고 무능한 직무유기다. 내 명의의 등기를 치고, 주삿바늘이 내 팔에 꽂혀야 문제는 풀린다. 뜬구름 잡는 숫자는 난무하는데, 도대체 그 많다는 집과 백신은 어디에 있을까.

하현옥 금융팀장

하현옥 금융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