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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찌 끊고 도주했는데···함바왕 ‘훼손죄’ 처벌 못한다 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20년 5월 17일 ‘함바왕’ 유상봉씨. 임현동 기자

2020년 5월 17일 ‘함바왕’ 유상봉씨. 임현동 기자

최근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했다가 보름 만에 검거된 ‘함바왕’ 유상봉(74)씨가 전자발찌훼손죄 처벌은 피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법은 성폭력·살인 등 흉악범의 경우 형기를 마친 뒤에도 일정기간 신상공개와 전자발찌 착용을 부가형으로 선고할 수 있고 이를 어길 경우 전자발찌훼손죄로 처벌할 수 있다. 하지만 유씨는 ‘전자발찌 착용 조건부 보석제도’를 통해 석방된 뒤 발찌를 훼손한 경우여서 법률상 처벌 근거가 없다.

법무부 “재물손괴로라도 처벌토록 수사의뢰”

29일 법무부는 이 같은 법률 미비를 보완하기 위해 전자장치부착법(전자발찌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유씨에 대해선 재물손괴나 공용물건손상죄 등으로라도 처벌할 수 있도록 수사 의뢰를 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현행 전자장치부착법에 따르면 성폭력, 미성년자 유괴, 살인, 강도 등 4대 강력 범죄를 저질러 형 집행 종료(면제·가석방 등 포함) 직후 전자발찌를 부착한 사람이 발찌를 몸에서 임의로 분리하거나 손상 등을 입히면 안 된다. 이를 어길 경우 전자발찌훼손죄를 적용해 7년 이하의 징역 혹은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물릴 수 있다.

그러나 유씨는 전자장치부착법에 따른 4대 강력 범죄를 저지르고 전자발찌를 찬 게 아니었다. 지난 총선에서 윤상현 무소속 의원 등과 윤 의원 당선을 위해 경쟁자들을 허위 고소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지난해 10월 7일 구속기소 됐다가 인천지법 형사합의15부(부장판사 이규훈)의 재판 도중인 올해 4월 5일 전자발찌 부착 조건으로 보석 석방된 상태였다.

전자발찌 보석 제도는 지난해 8월 5일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에 의해 새롭게 시행된 제도다. 불구속 재판 원칙을 현실화하고 고질적인 교정시설 과밀화 문제를 해결할 목적이었다.

7월 29일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임현동 기자

7월 29일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임현동 기자

보석 대상자에겐 발찌훼손죄 물을 근거 없어

문제는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은 유씨 등에 대해 전자장치부착법에서 전자발찌 훼손을 금지하는 조항과 처벌 조항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유씨가 전자발찌훼손죄를 피할 수 있는 배경이다. 이에 너무 급하게 전자발찌 보석 제도를 도입하다가 법 개정을 소홀히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또 애초에 유씨가 전자발찌를 공업용 절단기로 해체하고 도주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부실한 제도적 기반에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가뜩이나 보호관찰관의 업무 부담이 과중한 상황에서 인력개편 노력 없이 전자발찌 보석 대상자 감독 업무까지 떠안긴 셈이기 때문이다.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9년 말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의 보호관찰 직원 1인당 관리 인원은 27.3명이지만, 한국의 보호관찰관은 1인당 118명에 달했다.

졸속으로 전자발찌 보석 제도 도입했나

정부가 졸속으로 전자발찌 보석 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은 또 있다. 법무부는 제도 도입 당시 “위치추적 전자장치로 손목형 전자장치(전자팔찌)를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유·무죄를 다투고 있는 피고인에게 4대 강력 범죄를 저지르고 형기를 마친 사람과 똑같이 전자발찌를 채우는 건 인권침해 여지가 높다”는 여론의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 전자팔찌 대신 임시방편으로 전자발찌 보석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아직 전자팔찌 개발 업체(SK텔레콤 총괄)가 법무부 기준에 부합하는 제품을 생산하지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부품 수급에 차질이 빚어졌던 것으로 안다”며 “다음 달부터는 전자팔찌를 도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유씨는 지난달 29일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가 별도의 사기죄로 징역 1년 형을 확정 선고하자 이달 12일 형 집행을 피하기 위해 전자발찌를 공업용 절단기로 끊고 잠적했다. 잠적 직전 가족과 지인들에게 “극단적 선택을 하겠다”고 예고했지만, 실제론 도주한 것이었다. 그는 보름 만인 27일 경남 사천시에서 검찰 추적팀에 검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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