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당한 중년의 투쟁…63세에 첫 주연 '갈매기' 정애화

중앙일보

입력 2021.07.29 12:25

업데이트 2021.07.29 13:05

영화 '갈매기'로 첫 스크린 주연을 맡은 배우 정애화(63)를 7월 27일 서울 동교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 '갈매기'로 첫 스크린 주연을 맡은 배우 정애화(63)를 7월 27일 서울 동교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영화사 진진]

28일 개봉하는 영화 ‘갈매기’(감독 김미조)는 이 사람, 저 사람 챙기다 정작 자신은 뒷전으로 살았던 어물전 상인 오복(정애화)이 시장 동료이자 재개발 대책위원장 기택(김병춘)에게 성폭행당한 뒤 변화하는 모습을 그렸다. 성폭행 피해 상황을 직접 묘사하는 대신 사건 이후 오복이 겪는 부당한 일들과 그에 맞서는 모습을 밀도 높게 담아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을 받았다.

28일 개봉 영화 '갈매기' 주연 정애화
시장 동료에 성폭행 당한 중년의 투쟁
영화제 수상작 연기파 조단역 도맡다…
예순셋에 첫 스크린 주연 "정신없이 찍었죠"

오복 역의 배우 정애화(63)는 연기경력 24년 만에 첫 스크린 주연을 맡았다. 쾌활했던 오복이 그날 직후 하혈하는 줄도 모르고 도망치듯 걸어 나오고, 결혼을 앞둔 큰딸에게 어렵게 사실을 털어놓고, 주위에 증언을 부탁하는 복잡한 심경을 매 순간 손에 잡힐 듯이 새겨냈다. 오복은 평소 언니‧오빠 하던 동료 상인들이 재개발일이 틀어질까 두려워 “한강에 배 한 번 지나간 게 대수냐”며 덮으려는 데에 분통을 터뜨린다. 대사가 없는 대목에선 거칠어진 피부결, 앙다문 입에서조차 속마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시집살이·자식…내 삶이 연기에 거름됐죠"

19일 시사 후 간담회에서 정애화는 “정신없이 찍었다. 제가 극단에 있다가 조금 공백이 있고 다시 연기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쉬었던 시간이 많은 자양분이 됐다. 결혼하고 시집살이해보고 자식도 낳아보고 했던 것들이 실감 나는 거름이 돼줬다”며 종종 눈물을 내비쳤다.
27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카페에서 따로 만난 그는 한결 밝은 모습이었다. 주로 연극무대에 서다 배창호 감독의 ‘길’(2006)의 여인숙 주인으로 스크린 데뷔해 칸영화제 초청작 ‘마돈나’(2015)의 담임 선생,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의 강렬한 슈퍼 사장, ‘죄 많은 소녀’(2018) 경민 할머니 등 조단역으로 얼굴을 알려왔다. 첫 주연 소감을 묻자 “신기하게 동요가 되지 않더라”고 했다. “이영애씨 주연의 ‘나를 찾아줘’(2019)에서 송씨할매 역을 하고 후배들이 ‘잘 풀리시겠는데요’ 그랬는데 그렇게 안 되더라.(웃음) ‘갈매기’ 같은 좋은 작품, 비중 있는 주인공을 만나기 어려운데 감사할 뿐”이라면서다.

"불의도 쉬쉬하던 세대…처음엔 오복에 공감 못해" 

영화 '갈매기'.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 '갈매기'. [사진 영화사 진진]

이 영화로 장편 연출 데뷔한 김미조 감독은 “애화 선배님을 대학원 동기의 단편 실습 현장에서 처음 봤다. 오복은 한 대를 맞으면 네 대로 되갚아주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애화 선배님이 발이 빠르고 기동성이 좋으시다. ‘작은 고추가 맵다’처럼 오복과 잘 어우러질 것 같았다”고 캐스팅 이유를 밝힌 바다. 정애화는 “제가 속도 없고 철도 없다”면서도 “처음엔 오복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 세대는 불의를 당해도 감추고 쉬쉬하고 살아왔잖아요. 저 같으면 한두 번 하다 포기했을 것 같은데 오복은 꿋꿋하게 밀고 나가죠. 오복이 그 끈을 놓지 않는 게 집착으로 보일까 봐, 그래서 인제 적당히 그만하지, 라면서 관객들이 오복 편이 돼주지 않을까 봐, 조심스러워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영화 '갈매기'.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 '갈매기'. [사진 영화사 진진]

시장 동료들뿐 아니라 남편조차 오복에게 가시가 돋친 말만 하는 상황들은 오히려 이해가 갔단다. “이 정도 살다 보면 경험하잖아요. 그런 것이 연기에는 재산이죠. 어떤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그들의 속성을 알곤 하는데 영화가 그걸 적나라하게 잘 찍어서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정말 성폭행 당했다면, 처참한 마음으로 연기" 

오복의 처지에 대해선 “정말 그런 상황을 당했다면, 하는 마음으로 연기했다. 처참하고 많은 생각이 오갔다”고 했다. “주어진 역에 집중할 때보다 지금 한발 떨어져 영화를 보며 뭔가 오는 느낌이에요. 오복을 통해 내가 어떤 인간인지 돌아보고 힘을 얻게 됐죠. 집에서나 주변에서도 ‘알았다’고 회피하고 상처받고 말았을 일을 ‘그렇게 하니까 기분 안 좋다’고 말할 수 있게 됐어요.”

실제 딸이 둘이라, 극 중 오복이 딸들의 도움으로 용기 내는 장면들이 와 닿았다고. 오복이 치매가 있는 노모와 통화하는 장면을 말할 땐 실제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이 맺혔다. 간담회 때도 “‘엄마처럼 안 살 거야’ 했는데 영화에서 문득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안 닮아야지 했는데 닮아가고 있었다”며 눈시울을 붉힌 그다.

영화 '갈매기'.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 '갈매기'.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에서 소리를 딱 지르는데 내 목소리가 엄마 목소리더라. 화 나서 소리 지를 때, 한숨 팍 쉴 때 넋두리가 어느덧 닮았더라”면서다. “어머니한테 ‘갈매기’ 오복 같은 강인함이 있어요. 고향이 충남 논산인데 엄마가 큰 음식점, 여관을 하면서 억척스럽게 살림을 끌어오셨어요. 교육열이 워낙 있으셔서 우리 3남 1녀를 초등학교 때 서울로 다 유학 보냈죠. 아버지가 예순셋에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가 지금 아흔이신데 항상 엄마 얘기하면 목에 걸려요. 엄마는 왜 이렇게 집착이 많나, 뭐라 하고 나면 또 애처롭고. 딸이 하난데 난 왜 이렇게 살갑게 못 하나, 싶고.”

대학서 연기 매료…애들 키우며 재도전

영화 '갈매기'.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 '갈매기'. [사진 영화사 진진]

어렸을 땐 배우가 될 줄은 몰랐단다. 자다가도 깨서 노래를 부를 만큼 노래하길 좋아해 가수가 될 줄 알았다. 영화는 초등학교 때 서울에서 유학하며 주말마다 극장에 가는 게 다였다. 숀 코너리를 유독 좋아했다. 그러다 단국대 국문과에 들어가 과 선배들 연극무대를 보게 됐다. 늘 배우는 것을 좋아해 타자‧꽃꽂이 등 기웃거린 게 많았지만, 겁 없이 배우를 해보겠다며 손든 순간 적성을 찾았다. 첫 대학 연극은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졸업 후 대학로 극단에 잠시 들어갔지만 결혼하면서 모든 게 멈췄다. “결혼해서도 열심히는 살았어요. 아이들 학교에 ‘아동극부’가 있어서 아동극도 만들고 애들 수업도 나갔어요. 마흔 넘어 극단에 다시 가서도 실버연극교실, 청소년연극교실, 새터민‧직장인 연극교실 수업도 많이 했죠.”

24년이란 배우 경력은 이때 다시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를 센 것이다. 살림하는 동안엔 골골하던 몸이 다시 연기하니 건강해졌단다. “내 걸 찾은 느낌이었어요. 방 두 칸 집에 살 때는 고3인 큰애랑 작은애 공부하는 방 뒤에서 모노드라마 연습을 했죠. 나중엔 큰애가 대사를 외웠더라고요. 새벽 4시 일어나서 연습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며 대사 외웠죠. 연극 연습 끝나고 찌갯거리 들고 들어가서 아침 먹이고 또 연습 가고. 식구들 눈치를 봤는데 이제와 주연도 하니 인정받는 느낌이죠.”

"나이 먹어 시작한다고 초심 잃지 말자"

19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영화 '갈매기' 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 (왼쪽부터) 김미조 감독, 주연 오복 역 배우 정애화, 큰딸 역의 고서희, 막내딸 역의 김가빈이 참석했다. 김가빈은 김 감독의 언니로, 이번 영화 출연진 캐스팅 과정에도 참여했다. [사진 영화사 진진]

19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영화 '갈매기' 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 (왼쪽부터) 김미조 감독, 주연 오복 역 배우 정애화, 큰딸 역의 고서희, 막내딸 역의 김가빈이 참석했다. 김가빈은 김 감독의 언니로, 이번 영화 출연진 캐스팅 과정에도 참여했다. [사진 영화사 진진]

오랜 무명생활에 대한 답답함은 없었을까. “전혀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밖에 없죠. 코앞에 것 잘하는 거로만 바빴고 현실에 충실하며 한 발 한 발 여기까지 왔어요. 나이 먹어 시작한다고 초심을 잃지 말자, 했죠.”
“어느 배우처럼 되고 싶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다”는 그는 “나는 정애화일 뿐”이라고 했다. “저대로의 색깔, 호흡이 있을 뿐이죠. ‘진짜 거기 사람 같다’는 말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찍을 땐 옆에 슈퍼 아줌마들이 ‘우리보다 더 잘하네’ 해서 성공이었죠.”(웃음)
예순셋이란 나이보다 젊어 보여 오디션 땐 되레 불리한 적이 많았단다. “그래도 제대로 그 역할의 인물이 되면 되죠. 60대의 삶에 국한하지 않고, 언젠가 30대부터 80대까지 쭉 소화하는 작품이 있다면 대역 없이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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