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어렸을 때 저지르는 거거든요”
지난 23일 개막한 도쿄올림픽에서 김제덕(17·경북일고), 신유빈(17·대한항공), 황선우(18·서울체고) 등 10대 태극전사들이 ‘일’을 내는것에 대해 이에리사 전 태릉선수촌장이 한 말이다. 이 전 촌장은 그들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만한 ‘왕년의 막내’다.
“실수의 경험조차 큰 도움 될 것”
10대 때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무대를 누빈 이에리사(66) 전 촌장, 양창훈(51) 전 리우올림픽 양궁 여자국가대표팀 감독, 남유선(36) MBC 수영 해설위원들은 도쿄의 10대 돌풍을 어떻게 볼까. 세 사람은 29일 중앙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실수했던 경험조차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후배들을 격려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선전하고 있는 후배들을 본 소감은.
- ▶이에리사=“신유빈 선수한테 기대를 많이 했다. (32강에서 탈락했지만)시합은 다 지나간다. 이긴 것도 지나가고 패한 것도 지나간다. 본인 말대로 단체전에서도 자기 시합을 후회 없이 하면서 다음 올림픽을 기대하면 그땐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 ▶양창훈=“실업팀에 있다 보니 김제덕 선수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제덕이가 잘 쏜다’‘전관왕을 했다’는 소식을 양궁계 여기저기서 들었다. 보물 같은 선수니까 어깨부상만 잘 컨트롤하면 10년 이상 한국 양궁 짊어지고 갈 재목이다.”
- ▶남유선=“한국 선수들이 신체적 조건 때문에 성과 못 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0m에서 100m까지 황선우 기록이 굉장히 좋았다. 100m에서 오히려 편하게 실력을 펼칠 수 있을 거라 본다”
이젠 역사가 된 왕년의 10대 스타들
이들이 10대 시절의 활약은 한국 스포츠의 역사다. 이 전 촌장은 만 15세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1973년 제32회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 여자 탁구 단체전 우승의 주역이다. 신유빈이 지난 2019년 남녀 탁구 선수를 통틀어 역대 최연소 기록(만 14세 11개월 6일)으로 대표에 선발되면서 이 전 촌장의 기록이 깨졌다.
양 전 감독은 만 16세에 최연소 양궁 국가대표로 선발돼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4관왕에 올랐다. 김제덕보다 한살 어렸을 때다.
남 위원은 만 19세 때인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결승 무대를 밟았다. 지금까지 올림픽 결승에 진출한 한국 수영선수는 남 위원을 비롯해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2년 런던올림픽의 박태환, 이번 도쿄올림픽의 황선우 등 세 명 뿐이다.
- 어렸을 때부터 큰 대회에 나가는 게 많은 도움이 됐나.
- ▶양창훈=“고1 때 너무 잘했다 보니까 자만심을 가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건방도 좀 들었던 거 같고…그렇게 성적을 내고 나서 열심히 안 하고 소홀한 게 있었다. (2년 뒤 88서울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양궁 선발전에 당연한 건 없다. 여차하면 떨어진다.”
- ▶남유선=“중3 때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처음 나갔다. 너무 어릴 때 올림픽에 참여하다 보니 시합을 통한 기록 달성이라든지 목표 설정을 하진 못했다. 두 번째 올림픽에선 그런 부분을 보완했다. 그래서 큰 대회에 최대한 어릴 때 참가하고 도전하는 게 좋다.”
수평적 관계가 시행착오 줄여
10대의 경험이 지도자가 되는 데도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이 전 촌장은 사라예보 선수권 대회 일화를 언급하며 “단체전 우승하고 새벽까지 전화 받느라 개인전에선 컨디션이 엉망이 됐다”며 “그래서 훈련에 지장이 없도록 1988년 서울올릭픽(한국 여자탁구대표팀 감독) 때 처음으로 미디어데이를 만들었다. 태릉선수촌장 할 때도 출입카드시스템 만들어서 선수들 훈련이나 리듬이 깨지지 않도록 했다”고 말했다.
도쿄올림픽 남자 양궁 단체전 경기에선 김제덕이 23살 위인 오진혁에게 “오진혁 파이팅”이라고 반말 응원을 한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대모비스 여자양궁단 감독으로 재직 중인 양 전 감독과 경기체중 코치를 지낸 남 위원은 수평적인 선후배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예전과 선후배 관계도 달라진 것 같다.
- ▶양창훈=“예전엔 뭐 하라고 하면 ‘네, 네’ 무조건 대답했는데 요즘 후배들은 왜 해야 하는지 물어본다. 거기에 대해 설명을 해줘야지 애들이 이해하고 납득을 한다. 오히려 이런 건 지금이 더 나은 거 같다. ‘왜 하기 싫으냐’‘왜 해야 하냐’ 소통을 하니깐 갈등으로 인한 시행착오를 덜 겪는 거 같다.”
- ▶남유선=“예전에는 팀 분위기를 선배들이 주도하고 후배들은 따라가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선후배를 나누지 않고 같은 동료로 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편안해진 느낌이다. 정해진 룰과 팀에서 정한 분위기에 맞춰가는 것보다 지금이 제 실력 발휘하기가 좋다.”
“어른들이 번역 잘못할 때가 많아”
‘디지털 네이티브’(어린 시절부터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 세대인 요즘 10대 선수들은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팬들과도 활발한 소통을 한다.
양 전 감독은 10대 선수들의 SNS 활동을 자연스럽게 봐달라는 입장이다. 그는 “본인들은 편하게 얘기하는데 어른들이 번역을 잘못할 때가 많다”며 “선수들의 튀는 행동을 보면서 ‘쟤는 왜 저런 생각을 하지’하고 의미 부여를 하는데, 선수인 거 빼면 이들도 10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전 촌장은 “우리 세대가 그렇게 안했다고 해서 ‘너네도 그러지 말아라’고 얘기할 순 없다”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좀 더 운동에 집중해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정도는 해본다”고 말했다. 그런 뒤 “이런 말도 ‘저게 바로 라떼야’라고 하려나요”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