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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이 알려준 이북인들 명당···풍기 산촌서 만난 평냉의 맛

중앙일보

입력

경북 영주시 풍기읍은 예부터 '작은 평안도'라 불렸다. 조선 후기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월남해서 정착한 이북 주민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서부냉면 같은 이북식 냉면을 파는 집이 명맥을 잇고 있기도 하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은 예부터 '작은 평안도'라 불렸다. 조선 후기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월남해서 정착한 이북 주민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서부냉면 같은 이북식 냉면을 파는 집이 명맥을 잇고 있기도 하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뙤약볕도 마다치 않고 긴 대기시간을 감수하는 식당이 있다. 바로 냉면집이다. 우래옥, 을지면옥, 평양면옥 같은 이북식 냉면을 파는 노포 이야기다. 그러나 아시는가. 서울에만 정통 이북식 냉면집이 있는 게 아니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도 오랜 내력을 자랑하는 냉면집이 있다. 맛도 좋지만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소백산 자락에서 냉면을 말게 된 사연이 무엇보다 흥미롭다.

예언서가 점지한 땅, 풍기

"몸을 보전할 땅이 열 있으니, 첫째는 풍기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골 사이에 있다."
조선 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경북 산촌에 웬 이북식 냉면?'이란 의문의 실마리가 되는 문장이다. 조선 후기 때부터 이북 사람들은 풍기로 건너왔다. 네이버도 구글도 없던 시절, 살 만한 땅을 찾던 이들에게 『정감록』이 길잡이 역할을 한 거다. 북쪽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혼란이 이어지자 더 많은 사람이 풍기로 내려왔다. 풍기읍사무소에서 근무했던 김인순(75)씨는 "1970년대 풍기에 살던 4200가구 중 약 1200가구 가 이북 출신이었다"고 회고했다.

풍기는 국내 인견 생산의 80~90%를 차지할 정도로 직물 산업이 발달했다. 이북서 직물공장을 하던 사람들이 풍기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풍기인견홍보관에 전시된 베틀.

풍기는 국내 인견 생산의 80~90%를 차지할 정도로 직물 산업이 발달했다. 이북서 직물공장을 하던 사람들이 풍기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풍기인견홍보관에 전시된 베틀.

이북 이주민은 주로 인삼, 사과를 재배하거나 직물 공장을 운영했다. 하나의 브랜드가 된 '풍기 인삼'과 '풍기 인견'은 모두 이북 사람들이 일군 산업이었다. 이북 사람이 많으니 이북음식을 내는 식당도 흔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명맥을 잇는 곳은 드물다. 약 50년 내력을 자랑하는 '원조 서부냉면'의 존재가 중요한 이유다. 평북 영변 출신인 고 김숙인씨가 시작한 냉면집을 이제는 아들 부부가 책임지고 있다.

'평양 맛'에 버금가는 냉면

원조 서부냉면은 메밀 향 진한 면발에 육향 진한 국물을 말아서 낸다. 처음엔 심심하지만 먹을수록 깊은 맛이 느껴진다.

원조 서부냉면은 메밀 향 진한 면발에 육향 진한 국물을 말아서 낸다. 처음엔 심심하지만 먹을수록 깊은 맛이 느껴진다.

서부냉면의 메뉴는 단출하다. 냉면(1만원)과 불고기(1만8000원)가 전부다. 냉면 하나라도 변치 않는 맛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김씨의 며느리 명연옥(60)씨는 "어머니가 하던 방식 그대로"를 신조처럼 삼는다. 특히 면발에 대한 고집과 자부심이 남다르다. 식당 뒤편 작업실에서 메밀을 직접 제분하고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면발을 뽑아서 삶는다. 육수도 허투루 만들지 않는다. 한우 사골과 갈비 등으로 약 달이듯 끓여서 만든다. 동치미 국물은 섞지 않는다.

원조 서부냉면은 한우의 여러 부위를 푹 고아 육수를 만든다.

원조 서부냉면은 한우의 여러 부위를 푹 고아 육수를 만든다.

명씨는 "냉면뿐 아니라 밑반찬에도 화학조미료를 일절 쓰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이 집 물냉면 맛은 서울의 평양냉면집과 비교해도 퍽 심심한 편이다. 그러나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 고소한 메밀 향과 치장하지 않은 소고기의 깊은 맛이 은은하게 입속에 번진다. 일본인 한식 칼럼니스트 하타 야스시(八田靖史)는 "한국의 많은 냉면집 중 서부냉면이야말로 북한에서 먹어본 평양냉면에 가장 가까운 맛이었다"는 평을 남겼다.

이북식 콩비지도 별미

풍기읍에는 이북식 냉면을 파는 집이 하나 더 있다. 원조 서부냉면에서 약 500m 거리에 자리한 '서문가든'이다. 이 집 역시 이북 출신 후손이 운영한다. 허정(66)·박순희(60)씨 부부가 1995년에 개업했으니 서부냉면에 비하면 역사는 짧다. 그러나 허씨 가족이 북한을 떠나와 식당을 열게 된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서문가든도 풍기를 대표하는 이북식 냉면집이다. 냉면 맛도 좋지만 뚝배기에 뭉근하게 끓여내는 이북식 콩비지도 별미다.

서문가든도 풍기를 대표하는 이북식 냉면집이다. 냉면 맛도 좋지만 뚝배기에 뭉근하게 끓여내는 이북식 콩비지도 별미다.

평안북도 구성에 살던 허씨 아버지 고 허왈섭씨는 해방 후 월남했다. 부산에서 빵을 팔며 가족이 따라 내려오길 기다렸다. 곧 전쟁이 터졌고 나머지 가족 9명도 고향을 떠났다. 강원도 철원에서 비극이 벌어졌다. 미군의 폭격을 받아 허씨 조부를 제외한 가족 8명이 몰살됐다. 부산에서 재회한 허씨 부자는 풍기에 터를 잡고 직물공장을 열었다. 사업이 번창했으나 거래처에 큰돈을 떼이면서 지속할 수 없게 됐다. 95년 공장 자리에 냉면집을 열게 된 배경이다.

서문가든 물냉면 국물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적당히 새콤달콤해서 무더운 여름날 벌컥벌컥 들이키기 좋다.

서문가든 물냉면 국물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적당히 새콤달콤해서 무더운 여름날 벌컥벌컥 들이키기 좋다.

허정·박순희씨 부부가 이북 출신은 아니지만 냉면이 낯설진 않았다. 부모님과 집에서 자주 해 먹던 음식이었다. 박순희씨는 "개업 초기 풍기에 살던 이북 출신 어른들이 많이 도와줘서 진짜 '이북의 맛'을 재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문가든 냉면(9000원)도 자극적이지 않다. 서부냉면 국물보다 신맛, 단맛이 조금 더 강한 정도다. 이 식당의 또 다른 별미는 이북식 콩비지(9000원)다. 불린 콩을 갈아서 시래기, 돼지 등뼈와 함께 뭉근하게 끓여낸다. 서문가든을 찾은 실향민이 냉면과 함께 꼭 찾는 메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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