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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세린 클라크의 문화산책

황진이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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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조세린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

조세린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

한국을 처음 방문한 1992년 인간문화재 박귀희 명인과 그의 제자 안숙선·강정숙(두사람 다 인간문화재)의 ‘가야금 병창’을 관람했다. 영화 ‘서편제’ 개봉 전이었는데, 국립국악원 우면당이 만석이었다. 장내에 전율이 흘렀고, 관객들은 큰 소리로 추임새를 곁들이며 공연자들을 격려했다. 그 날 나는 ‘가야금 병창’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트위터에 시조 올리고 ##MeToo 추가했을 것 #여성국극 ‘예인 황진이’ #판소리·연기 훌륭하나 #복합적 성격 못드러내

이듬해 박 명인이 타계했다. 더 조사해 보니 그는 ‘가야금 병창’으로 1968년 인간문화재로 등록되었고, 1940년대에는 ‘여성국극’에서 남성의 역할을 소화해 찬사를 받은 인물이었다.

여성국극은 해방 이후 기생 출신의 예인들이 생계 유지를 목적으로 1948년에 조직했다. 일본의 여성악극 ‘다카라즈카’에서 영감을 얻어 창시되었는데, 다카라즈카 역시 정통 가부키극, 즉 여자 배우의 활동을 금지해 여장남자가 여자 역할을 했던 1629년도 이전의 가부키를 본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여성국극은 ‘국극’(國劇)이라는 접미사를 사용해 기존 국악극의 전통을 잇는 장르를 신설했다는 의미를 부여하며 정통성을 추구했다. 사회적 반감과 기생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 때문에 여성국극은 금세 사라져버릴 뻔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남성 예인들의 자리가 비게 되었고 여성국극은 잠시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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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오자 1940~60년대 신문에서 매월 반복적으로 언급된 국극에 대한 관심으로 남녀혼성극인 창극의 인기가 줄어들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극작가 박황은 1976년 『창극사 연구』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가 설치면 나라가 망한다”는 속담과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책에서 그는 여성국극이 “창극사에 길이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을 뿐이며, 속죄할 수 없는 죄과를 범하였다”고까지 썼다. 전후 문화 담당자들은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극단이 국극을 대표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70년대에 추진한 ‘전통문화 제정사업’으로 많은 남성 국악인들은 정부 지원을 받는 공연에 참여하게 됐지만, 여성국극은 의도적으로 배제된 듯하다. 여성국극과 함께 음지로 물러난 박 명인 등 몇몇 예인들은 본질로 돌아가 다른 형태의 공연을 펼쳤다.

지난 6월 25, 26일 국립극장에서 최진숙 명인 주연으로 1996년 판 여성국극 ‘예인 황진이’를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뻤다. 최 명인은 마치 여왕과 같았다. 그런데 점잔 빼는 황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관람한 정은영의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은영은 여성국극의 사회·정치적 배경을 추적하고, 오늘날의 사회적 성 역할 및 사회·정치적 배경에 맞게 여성국극의 이미지와 퍼포먼스를 재구성했다. 이 전시에 대해 권미유는 코리아타임스 평론에서 “여성가극은 성(性) 규범과 문화적 동시대인들이 인지되고 구성되는 방식에 대한 매우 중요한 민족지학적 연구를 대표한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정은영이 여성가극의 역사와 본질의 복원보다 재창조에 집중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작년 8월 정은영은 ‘남산골한옥마을’ 웹사이트 기고문에 그의 새 프로젝트 ‘변칙 판타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변칙 판타지’는 전통과 관습으로부터 시작되어 그것을 존중하고 따르는 듯하다가도 이내 다른 경로를 상상하고 전회한다. 전통을 살아 숨쉬고 역동하는 것으로 재사유하기 위해 바로 이 변칙술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은영의 작품이나 예인 황진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공연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국극은 여전히 한국인들의 정신 속에서 가늘게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활동 제한과 뉴트로 열풍이 맞물려 말표 맥주와 트로트 가락이 유행하는 오늘날, 여성국극은 1950년대풍 웹툰 ‘정년이’로 부활했다. 10대 소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는 이 웹툰은 김혜정·피소현의 2013년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주인공 윤정년은 목포 태생으로 가진 것은 소리 하나뿐이며 여성국극단에 들어가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웹툰 ‘정년이’는 충실한 역사 고증과 탄탄한 그림체로 역사적인 여성 인물의 복합적인 성격을 섬세하게 묘사해 2019년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했다.

처음으로 여성국극을 본다는 생각에 들떠 국립극장을 찾은 나는 다소의 실망감을 안고 공연장을 나왔다. 판소리와 연기는 훌륭했지만 황진이가 지닌 복합적인 성격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황진이는 1960년대의 전형적인 여성상에 머물러 있었다. 황진이가 당대 남성들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생애와 작품으로 미루어 볼 때 단순히 시대의 희생양으로만 볼 수는 없다. 나는 반항적 생존자 황진이를 상상해 본다. 황진이라면 여섯 세기 후인 현대에 태어났다 한들 오늘날의 초현대적인 서울생활에 아무 문제없이 잘 적응하고, 트위터에 시조를 올리고 맨 끝에 #MeToo를 추가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