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고구마에 밀리지만 주눅 안 들고 내 쪼대로 사는 감자

중앙일보

입력 2021.07.28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 (201)

좌측 울담에 소쿠리가 하나 걸려있다. 옆집에서 걸어 놓았다. 살구랑 참외가 한 가득이다. 아랫집에서 건네준 살구도 처리 못 해 상한 거 골라 버리는 중인데…. 전화하니 그건 그 집 맛이고 이건 우리 집 맛이라며 맛이 확실히 다르단다. 내가 키운 건 자식이나 작물이나 최고 잘났다. 여름의 농촌은 먹거리 천지다. 식구가 많아 의식주도 해결하기 힘들었던 옛날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는 호의호식이다. 싱싱하고 때깔 좋은 것은 돈으로 교환한다. 그러나 볼품은 없지만 먹을 만한 것은 버리지 못하고 나도 먹고 이웃과 나눔한다. 남에게 보내기엔 마땅찮아도 편한 지인들에게 아무 때나 들러 가져가라 말해둔다. 그래도 썩혀 버리는 게 더 많다.

어떤 농작물은 주인 잘 만나 허리띠에 리본까지 두르고 백화점 높은 문턱에 입성한다. 나머지는 거의 농산물시장의 경매 무대에서 잠깐 선을 보고, 여기저기 좌판 매대로 옮겨져 팔린다. 때로는 입담 좋은 주인의 탁월한 홍보능력에 따라 못난이도 눈길을 끌고 선택되기도 한다. 요즘엔 흠다리를 사랑하는 단체라던가 상처 난 과실야채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많이 늘었다.

며칠 전 일이다. 마을의 온 밭에 들깻잎이 지천이었다. 들깨는 척박한 땅에도 잘 자라 땅을 놀리기 아까워하는 노인들이 많이 심는다. 이쯤에 순지르기를 해주면 더 많은 들깨를 수확하니 그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고랑 고랑을 다니며 몇 포대를 딴다. 차고 넘치는 그 들깻잎을 버리기 아까워 이웃에게 한 포대씩 나눠준다. 아무리 깻잎의 향이 좋아 잘 먹어도 십 분의 일도 못 먹고 다 버리게 생겼다. 난감하다. 그냥 버리기엔 아까워 대책도 없이 늦은 밤까지 다듬어 씻어 놓았다.

여름의 농촌은 먹거리 천지다. 싱싱하고 때깔 좋은 것은 돈으로 교환하고 볼품은 없지만 먹을 만한 것은 버리지 않고 우리 가족도 먹고 이웃과 나눔도 한다. [사진 pxhere]

여름의 농촌은 먹거리 천지다. 싱싱하고 때깔 좋은 것은 돈으로 교환하고 볼품은 없지만 먹을 만한 것은 버리지 않고 우리 가족도 먹고 이웃과 나눔도 한다. [사진 pxhere]

다행히 휴무인 다음 날, 나는 유튜브를 틀어놓고 깻잎으로 별별 요리 작품을 만들었다. 깻잎을 9번 덖어 만든 깻잎 차(이건 이열치열의 자세로 무심으로 빠져들어 해볼 만하다), 깻잎장아찌, 깻잎김치, 조림, 무침, 전 등등. 퍼 돌릴 일만 남았다. 요리하는 일이 참 오랜만이다.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나를 위한 요리는 해보지 않았다. 젊어서는 무럭무럭 자라는 자식들을 위해, 중년이 지나서는 아픈 남편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정성으로 마음을 다해 만들었던 것 같다.

창고에 들어가 모아놓은 농작물을 헤쳐 썩은 것을 골라 버리다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아무도 눈길 안 주는 각각의 이름들이 모여 마치 동물 농장의 풍경처럼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버려진 땅에서도 꽃이 폈다는 말처럼 어떤 건 싹을 틔우고, 어떤 건 다른 색으로 변신하며 살아남기에 용을 쓴 흔적이 보인다. 하여 이번엔 누가 이곳을 벗어나 각자의 이름에 걸맞은 음식 또는 제품으로 거듭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저 여자의 손에 버려질 것인지 살아남기 위한 눈치를 보는 듯하다.

나는 창고에 있는 참외, 오이, 양파를 주섬주섬 챙겨와 베이킹소다를 풀어 물에 담아놓는다. “이번에는 너희들에게 장아찌란 호를 붙여주마. 온갖 고난을 이기고 열매 맺기에 성공한 너를 내가 이름 불러주마. 그러니 양념과 함께 버무려져 버려져도 슬퍼하지 마라. 여한 없잖아. 하하.”

또 광주리가 대문에 걸렸다. 이번엔 앞집 감자다. 한해살이 작물 중 일등으로 수확하는 구황작물이다. 가장 무거운 무게지만 가장 낮은 가격으로 매김 당하니 억울하겠다 싶다. 몸집이 빨리 커진 만큼 작은 흠집에도 호들갑스레 썩어버리는 녀석이다. 감자는 이른 봄 흙 이불을 덮고 어미 씨감자의 가는 손가락에 매달려 혼자 덩어리를 키워낸다. 그렇게 일찍 성공해도 풍파를 헤치고 자란 사촌인 고구마에 여러모로 밀린다. 아침부터 어디선가 시궁창 썩는 냄새가 쿰쿰하게 코를 자극한다. 앞집 어른은 썩어가면서도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감자의 새로운 재기를 돕느라 아침마다 물을 바꿔주며 격려한다. 우리는 감자의 변신을 믿기에 기다리며 지켜본다. 희한한 맛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맛있는 감자떡을 생각하며 향기롭다 말해준다.

그러고 보면 살아있는 모든 생물체의 생로병사도 인간이나 다름없다. 오늘은 감자에게서 돈과 명예에 주눅 들지 않고 열정과 함께 내쪼대로 사는 걸 배워본다.

그나저나 까칠한 성격의 이 감자님은 또 어찌 처리할까나….

관련기사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