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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취향저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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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취향(趣向·taste, liking):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

삶의 많은 문제는 취향의 문제 #타인의 시선에 부응하기보다 #자기만의 취향에 충실해야 행복

지금은 취향저격(趣向狙擊)의 시대다. 어떤 선택의 이유를 물었을 때 ‘취향저격’이라는 네 글자를 대면 그걸로 충분하다. 다른 해명은 필요 없다. 취향저격 앞에서는 권위도 전문성도 품질도 큰 의미가 없다. 그 앞에서는 학벌도 나이도 계층도 설 자리를 잃는다.

취향저격은 불필요한 외부의 간섭을 무력화시키는 최고의 무기이면서 삶의 주체성을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다. 지극히 개인적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대는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서양 사람들이 ‘No reason’이라는 문구를 문신으로 새기듯, 우리는 취향저격이라는 정신적 문신으로 진정한 개인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하고 있다. 모든 선택에 대해 시시콜콜 해명해야만 했던 억압의 시대가 빠르게 저물어가고 있다.

우리는 더 자주 ‘제 취향이 아닌데요’, ‘완전 취향저격입니다’라고 말해도 된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더 떨쳐버려도 좋다. 옳은 선택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선거에서조차, 내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지지하지 않을 수 있고, 취향저격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지지할 수 있다. 후보자들은 공약만을 보고 객관적으로 평가해달라고 열변을 토하지만, 내 취향에 맞지 않는 몸짓과 단어를 쓰며 연설하는 후보자는 선뜻 지지할 수가 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배우자나 연인을 선택할 때도 취향을 따지는데, 그보다 덜 중요한 정치인을 뽑을 때 취향을 따지는 것은 당연하다.

취향저격의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취향의 문제를 수준의 문제로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꼰대라고 부른다. 나이와 학력, 재산과 계층을 내세워 삶의 모든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만 규정하는 그들의 삶에는 취향의 영역이 극히 적다. 온통 수준과 기능의 영역만이 존재한다.

삶을 취향의 문제로 보는 사람은 삶을 예술로 본다. 예술은 본질상 취향의 문제다. 모두가 피카소를 좋아할 수 없고, 모두가 똑같이 BTS에 열광할 수는 없다. 아무도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취향의 영역이라고 동의하기에 우리는 각자의 스타일로 옷을 입고, 각자의 취향대로 음식을 먹는다. 삶을 취향의 문제로 보면 타인은 비교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삶에 다채로움을 가미해주는 축복과 감사의 대상이다.

반면에 삶을 수준의 문제로 보는 사람은 삶을 예술품이 아닌 기능품의 관점으로 본다. 핸드폰을 살 때는 가장 최신 기능, 가장 많은 기능, 가장 편리한 기능을 따진다. 이왕이면 가장 고가의 물건을 사려고 한다. 대량 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복사물들일지라도 기능만 좋다면 개의치 않는다. 그러므로 삶을 수준의 문제로 보는 사람은 더 좋은 것을 가진 타인을 부러워한다. 그들에게 남들과의 비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삶을 취향의 문제로 본다는 것은 타인을 예술로 본다는 의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자체로 예술이다. 대체 가능한 부속품이 아니다. 그렇기에 삶을 취향의 문제로 보는 사람은 나보다 가지지 못한 자, 나보다 배우지 못한 자들과의 대화에도 진심이다. 그들의 삶에서 나와 다른 취향과 감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삶을 수준의 문제로 보는 사람은 타인을 기능으로 파악한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과 기능의 관점에서 타인의 가치를 재단한다. 따라서 수준과 기능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사람에게는 마음을 쏟지 않는다.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의 천재들은 수준과 취향의 경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가급적 삶의 많은 영역을 취향의 영역으로 바꾸는 사람들이다. 길섶에 핀 이름 없는 풀에 허리 숙여 눈길을 주고, 동네 구멍가게의 낡은 간판 글씨에도 감탄할 줄 안다. 그들에게는 취향저격의 단골집이 많다.

반대로 삶의 둔재들은 이름 없는 대상들에게는 절대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유명한 맛집은 있을지언정 단골집은 없다.

취향이 삶의 화두가 될 때 찾아오는 최고의 행복은 타인으로부터의 자유다. 우리가 느끼는 삶의 불행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서 기인한다. 이 감옥으로부터의 멋진 탈출을 꿈꾸고 있다면 “제 취향이라서요”라고 말하면 된다. 정답과 모범에 집착하는 간섭 시대를 향해 한 방 먹이고 싶다면 “제 취향이 아닌데요”라며 씩 웃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