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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댓글 조작 유죄’ 대법원 판결, 청와대 왜 말이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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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태규 변호사, 전 부산지법 부장판사

김태규 변호사, 전 부산지법 부장판사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민주당 조병옥 대통령 후보가 그해 2월 15일 미국 병원에서 신병으로 사망하면서 그와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사실상 대통령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부통령 후보로는 자유당 이기붕과 민주당 장면이 출마한 상태였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과 부통령이 러닝메이트로 나오는 미국과 달리 각각 따로 선출하는 제도였다. 이 때문에 대통령과 부통령이 대립하는 정당에서 나올 수 있었다.

조작된 정보로 국민 판단력 왜곡 #청와대 관련성 별도로 수사해야

당시 이 대통령이 84세의 고령이라 건강상 이유로 임기를 못 채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이 때문에 부통령 선거가 매우 과열됐고 자유당 강경파는 무리수를 계속 뒀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최인규는 “당선만 되면 된다”며 경찰을 동원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독려해 5·16 이후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됐다. 결국 이 대통령은 “망측스러운 불의를 보고서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나 다름없다”고 하면서 막 시작된 임기를 포기하고 사임했다.

이상은 반세기 전에 벌어진 3·15 부정선거의 요지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12년 만의 일이었다. 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나았을 리 없을 때였다. 그런데도 선거 부정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거침이 없었고, 관련자 후속 처리는 지금보다 단호했다.

‘드루킹’ 김동원 일당은 2016년 12월 4일부터 2018년 3월 21일까지 9971만 회의 댓글을 조작했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그중 8840만 회 댓글 공작에 공모했다는 것이 허익범 특검의 수사 결과다. 디지털 방식의 선거 부정이라 감이 잘 오지 않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조작된 정보로 국민의 판단력을 왜곡시켰다. 사람의 의식을 오염시켰다는 면에서 무턱대고 하는 강요보다 수법이 저열하다.

심각한 선거 부정이 대법원 판결로 최종 확인됐는데도 청와대는 “공식 입장이 없다”고 했다. 가장 큰 수혜를 봤을 문재인 대통령은 침묵하고 있다. 여당은 “대통령과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야당은 기껏 사과를 요구한다. 대통령과 무관한지는 별도 수사로 밝혀야 한다. 김 전 지사와 대통령은 ‘정치 동일체’라고 볼 여지가 많다. 김 전 지사에 대한 유죄 판결이 확정된 상태에서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이뤄져야 상식에 부합한다. 대통령이 몰랐다는 말 한마디로 수습될 사안이 아니다.

“(지지율 차이가 커서) 댓글 조작이 없었어도 어차피 승리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핑계가 되지 못한다. 대통령에 대한 형사상 소추가 불가능할 뿐이지 수사를 막을 방법은 없다. “경인선에 간다”라는 말이 국민의 뇌리에 아직 선명하다. 2018년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관련 재판은 아직 진행형이다. 필요하면 ‘김대업’도 데려오고, ‘생태탕’도 만들어 낸다. 대통령은 자신의 대선 캠프에 있던 사람을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에 앉혔다.

대의민주주의는 선거 없이 설 수 없다. 정치적 의사 표현이 아무리 자유로워도 마지막 관문인 선거가 왜곡되면 모두 쓸모없어진다. 선거의 염결성(廉潔性)은 그렇게 중요한 것인데, 어째서 지금 태도들이 모두 트릿하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대통령 수사나 하야는 고사하고 사과할 기미조차 없다. 우리가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않는 ‘죽은 백성’이 된 것인가 보다.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받은 형량(징역 4년)에 비하면 김 전 지사의 징역 2년은 솜방망이 처벌이다. 김 전 지사가 수감 전에 이낙연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에게 “대통령을 잘 지켜달라”고 했다는 말이 미담이 되는 세상이다. 정치적 주군의 결사옹위만이 소중하고, 선거 조작에 속은 국민의 허탈감 따위는 안중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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