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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술맛’ 사라질 위기…대구의 명주, 디지털 모금 나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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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면

대구 전통주인 ‘하향주’의 명맥이 끊길 위기다. [사진 달성군]

대구 전통주인 ‘하향주’의 명맥이 끊길 위기다. [사진 달성군]

“한국을 대표하는 명주를 만들겠다는 신념 하나로 평생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제조 공장 설립에 들어간 대출금 이자를 갚을 수 없는 상태가 됐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해외 사업가들이 구체적인 금액을 제시하면서 인수 의사를 밝혔습니다.”

1100년 전 신라시대 유래한 전통주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박환희씨 #이민 접고 고향 달성서 4대째 계승 #판매 부진, 매각 위기에 펀딩 조성

고향인 대구 달성군 유가읍에서 전통주인 ‘하향주(荷香酒)’를 빚고 있는 대구 무형문화재 제11호 기능보유자 박환희(71)씨. 그가 1100년 전통의 하향주 전통조주법 맥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출 이자도 갚지 못할 정도의 경영난 탓이다.

하향주는 대구 달성군 유가면에 거주했던 밀양 박씨 종가에서 전승된 술이다. 연꽃 향기가 난다 해서 하향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화, 찹쌀, 누룩, 비슬산의 맑은 물 등을 사용해 빚는다. 청주와 비슷한 맛이 나며, 입에 머금으면 꽃향이 감돈다.

하향주의 기원은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도성국사가 수도한 대구 비슬산 유가사 도성암이 불에 탄 후 보수하면서 인부들을 위해 빚은 술이 토주였다.

대구 전통주인 ‘하향주’의 명맥이 끊길 위기다. 사진은 하향주 제조기능보유자 고(故) 김필순 할머니. [중앙포토]

대구 전통주인 ‘하향주’의 명맥이 끊길 위기다. 사진은 하향주 제조기능보유자 고(故) 김필순 할머니. [중앙포토]

이 술이 비슬산 일대 민가에 전승되면서 하향주가 됐다고 한다. 조선 광해군(재위 1608∼1623) 때는 비슬산에 군사가 주둔하고 있을 때 주둔대장이 왕에게 이 술을 진상했더니 광해군이 “독특한 맛과 향이 천하약주”라고 칭찬했다는 설이 있다.

『동의보감』에도 ‘독이 없으며 열과 풍을 제거하고 두통을 치료하고 눈에 핏줄을 없애고 눈물 나는 것을 멈추게 한다’고 기록돼 있다.

박씨는 4대째 하향주 전통조주법을 계승하고 있다. 하향주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이민갔던 미국에서 삶을 뒤로하고 1994년 유가읍에 정착해 술을 빚어 왔다. 2013년 대출금 15억원을 포함해 18억여원을 투자해 990㎡ 규모의 제조공장과 창고 등을 신규로 지었지만, 판매 부진 등으로 인해 자산 매각 위기에 처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해외 사업가들은 적극적으로 인수 의사를 전해왔다. 박씨는 “하향주의 맛을 본 중국의 한 사업가가 67억원이라는 구체적 금액을 제시하기도 했다”며 “자금 압박 속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하향주의 주류 제조 허가는 민속주에서 전통주로 변경하고, 박씨는 대구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자격도 반납할 방침이다.

하향주 전통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응원 메시지가 전해졌다. 박씨는 “공장에 찾아오거나 대구시에 민원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고, 하향주를 어디서 살 수 있느냐는 문의도 많이 들어왔다”고 전했다.

박씨는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최근 ‘크라우드 펀딩’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크라우드 펀딩은 온라인 플랫폼 등을 통해 불특정 다수 대중에게 자금을 모으는 방식이다. 이른바 ‘디지털 모금’이다.

박씨는 “이번 펀딩을 통해 많은 분께서 하향주 맛을 느끼고 주변에 알려줘 전통을 이어줬으면 좋겠다”며 “우리 술 시장을 전통주로 점차 바꿔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지난 23일 종료된 크라우드 펀딩으로 1174만5000원을 모았다. 당초 목표액이던 100만원보다 11배 이상 많다.

박씨는 “펀딩을 통해 모인 돈은 앞으로 하향주를 만들기 위한 환경 조성과 시설 정비에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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