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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의 '더 모닝'] MBC 이상한 나라 소개, '좌정관천' 증상 같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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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올림픽 참가국 소개 문제 등에 대해 사과하는 박성제 MBC 사장(26일). [사진 MBC]

도쿄 올림픽 참가국 소개 문제 등에 대해 사과하는 박성제 MBC 사장(26일). [사진 MBC]

안녕하세요? 오늘은 외국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한국인이 하멜의 이야기를 평정심을 갖고 읽기는 쉽지 않다. 조선 조정이 그들의 표착을 계기로 넓은 세상에 눈을 뜨고 미래를 준비했더라면 그 후 조선(한국)의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특히 나가사키에 상관을 열어주고 왕성한 무역을 하고 때를 놓치지 않고 세계정세를 판독한 왜국(일본)과 조선을 비교하면 한국과 일본의 운명이 17세기 나가사키에서 갈렸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지난해 1월에 별세한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가 2012년에 출간한  『소설 하멜』에 쓴 ‘작가의 말’입니다. 이 책은 1653년에 풍랑을 맞아 제주도 땅을 밟게 된 헨드릭 하멜 등 네덜란드 선원의 조선 체류 역사를 소설 형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김 대기자는 선원 36명이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는데 알아보지 못해 ‘국가적인 기회 상실’의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멜 표류기』를 보면 하멜은 배를 타고 몰래 일본으로 도망치기까지 13년 동안 조선에 머물렀습니다. 하멜은 항해와 거래를 기록하는 서기였습니다. 일행 중에는 별자리로 자신들이 있는 곳의 위도와 경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항해 전문가가 있었고, 총ㆍ포 등 무기에 밝은 이도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부터 일본까지 오가며 아시아의 여러 항구 도시에서 물건을 사고팔았기에 국제 정세에도 밝았습니다. 김 대기자가 말한 대로 일본은 네덜란드 등과 교역하며 신문물을 습득했습니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서 한 일은 임금(효종)과 대신들의 위신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 한양 궁궐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효종이 행차할 때 옆에 병풍처럼 늘어서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대신들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질 때는 그곳에 가서 춤과 노래를 하는 일종의 사당패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조선 조정은 이들을 전남 지역으로 내려보내 그곳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서양의 무기 개발 기술을 배운다고 청나라가 의심할 것이 두려워서였습니다. 조선이 이들에게서 기술이나 문물을 배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26년 앞선 1627년에 배에서 내려 조선 땅을 밟았다가 억류돼 귀화한 네덜란드인 박연(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이 통역관 역할을 했습니다.

효종과 대신들은 왜 이들을 ‘장식품’으로 활용했을까요? 저는 청나라 ‘오랑캐’에게 당한 치욕 때문에 이런 식으로 외세에 대한 우월감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멜이 왔을 때는 병자호란 종전 16년 뒤입니다. 효종은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머리를 땅에 박은 인조의 아들입니다. 청에서 8년간 볼모 생활을 했던 그는 '북벌'을 외쳤지만 실제로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심리학은 열등감과 우월감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설명합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우리 사회에 배어 있었습니다. 선진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국력이 커지고 나라가 잘살게 되자 막연한 우월감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해외여행에서 주마간산으로 구경하고 와서는 “별거 없더라. 우리가 더 잘살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신문의 국제 뉴스는 절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한류나 외교 갈등처럼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것 아니면 기사로 잘 다뤄지지도 않습니다. 온라인으로 소비되는 해외 뉴스의 상당 부분은 엽기와 일탈의 황당 뉴스입니다. 선정성이 눈길을 끄는, 알아야 할 내용은 없는 것도 많습니다. 포털사이트로 묶인 뉴스 소비자와 생산자가 악순환의 사이클을 만듭니다.

MBC가 올림픽 개막식을 중계하며 황당한 참가국 소개 사진과 자막을 넣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체르노빌 원전, 아프가니스탄은 양귀비, 노르웨이는 연어, 루마니아는 드라큘라, 이런 식이었습니다. 이 자료를 만들고 감수한 이들이 솔직히 현실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한국의 현실 말입니다. 시청자들이 떠올릴 만한 게 그 정도이고, 그렇게 해야 눈길을 끈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시청자들이 우월감을 느끼게 하면 그것도 성공이라고 여겼을 것 같습니다. 올림픽은 공인된 ‘국뽕’의 시간이니까요.

지난 역사를 보면 나라 밖 물정에 밝았을 때는 나라의 힘이 커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백신 부족 사태도 ‘좌정관천(座井觀天)의 나라가 됐기에 생긴 일인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말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외국 제약사가 백신값 바가지 씌우려 해서 구매를 늦추고 있다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외세’에 대한 막연한 피해 의식과 근거 없는 우월감이 나라의 앞길을 어둡게 합니다. 김영희 선배의 탄식이 들리는 듯합니다.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어제 "한국인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잘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한국 언론의 도움으로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에 대해 더 긍정적인 정보를 얻게 되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관련 기사를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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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고개숙인 MBC…우크라이나 대사관 "불편하다"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 중계 당시 선수단 소개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진을 사용한 [MBC 방송화면 캡처] [출처: 중앙일보] 사장이 고개숙인 MBC...우크라이나 대사관 "불편하다"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 중계 당시 선수단 소개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진을 사용한 [MBC 방송화면 캡처] [출처: 중앙일보] 사장이 고개숙인 MBC...우크라이나 대사관 "불편하다"

지난 23일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을 중계한 MBC가 선수단 입장 화면에 부적절한 자료사진과 자막을 사용한 일에 대해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불편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고르 데니식 주한우크라이나 대사대리는 이날 뉴스1의 이메일 질의를 받고 "최근 상황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다"며 "비극적인 사건이 언급된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하다(uncomfortable)"고 했다.

MBC는 당시 우크라이나 선수단이 등장하자 화면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관련 사진을 걸었다가 비난을 받았다.

데니식 대사대리는 "우크라이나는 오랜 역사를 가졌고 여러 분야에서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며 "우수한 인재와 풍부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데 이 같은 비극적인 사건으로만 비쳐서 불편하다"고 했다.

이어 그는 "한국에 우크라이나는 지리적 거리가 있고 많은 한국인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잘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서도 "한국 언론의 도움으로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에 대해 더 긍정적인 정보를 얻게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특히 데니식 대사대리는 "지난 주말 동안 대사관은 (이 사건으로) 한국 친구들로부터 많은 따뜻한 응원 메시지를 받았다"며 "우린 한국 친구들에게 매우 감사하고 있다"고 전하며 양국의 우호적 관계가 지속하길 희망했다.

내달 우크라이나는 독립 30주년을 맞는다. 내년 2월 10일은 한국과 우크라이나 수교 30주년이다. 데니식 대사대리는 "한국 언론이 이런 역사적인 날짜들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MBC는 노르웨이 선수단 입장 때는 연어 사진을, 아이티를 소개하면서는 '대통령 암살로 정국은 안갯속'이라고 표현했다. 이밖에도 마셜제도를 소개할 때는 '한때 미국의 핵실험장'이라는 자막을, 팔레스타인을 소개하면서는 이스라엘 장벽을 그림으로 걸어 물의를 일으켰다.

주말 동안 비난을 받은 MBC는 이날 오후 박성제 사장이 대국민 사과 형식의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박 사장은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등 대사관에 사과 서한을 전달했다고 했으나, 아이티 등 국내에 대사관이 없는 국가의 경우 아직 서한을 전달하지 못했다고 했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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