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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이건희 기증전에서 만난 아기 업은 소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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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실물 영접’이란 말은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인가 봅니다.”

지난 21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한 ‘이건희 기증전’ 관련 기사가 나갔을 때 한 독자가 남긴 댓글입니다. 삼성가 유족들이 고(故) 이건희 회장이 평생 수집한 문화재와 미술품을 기증한 후 ‘이건희 컬렉션’의 실물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을까요. 미술 담당 기자들도 그 실체가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을 직접 본 소감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압도감’과 ‘친근감’이었습니다. 우선 전시작은 58점에 불과하지만, 김환기·이중섭·박수근·유영국·장욱진 등 이른바 ‘미술 교과서 거장’들의 대표작이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그런데 이 압도감은 뭔가 다릅니다. 보는 이를 무겁게 짓누르는 게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가 마음속으로 푸근하게 훅 치고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장욱진 ‘공기놀이’ 1938, 캔버스에 유채, 65x80.5㎝.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 ‘공기놀이’ 1938, 캔버스에 유채, 65x80.5㎝.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1918~90)이 양정고보 시절 그린 ‘공기놀이’(1938)도 그런 감동을 전하는 그림입니다. 장욱진은 이 그림으로 제2회 전국학생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는데요, 노는 아이들 모습을 화면에 꽉 차게 배치한 구도와 색채가 눈에 띕니다. 이번 전시엔 장욱진의 이 그림을 특히 사랑해서 오래 소장하고 있었다는 화가 박상옥(1915~58)의 1940년 작 ‘유동(遊童)’도 대상에 대한 따스한 애정을 보여줍니다.

박수근(1914~69)의 1963년 작 ‘유동(遊童)’도 만났습니다. 아기를 업고 서 있는 소녀와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노는 아이들 모습이 담긴 그림입니다. ‘노는 아이들’을 그린 각기 다른 세 작품의 흥미로운 공통점도 있습니다. 화면 한쪽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아기 업은 소녀들입니다. ‘아이가 아이를 돌보던’ 그 옛날의 흔한 풍경인데요, 어린이의 삶도 고단했던 시절을 짠한 시선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박수근, 유동, 1963, 캔버스에 유채, 96.6x130.5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 유동, 1963, 캔버스에 유채, 96.6x130.5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은 12세에 우연히 밀레의 ‘만종’을 보고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지요. “그 시대 여인의 삶이 얼마나 큰 온기를 집안에 불어넣는지”(『내 아버지 박수근』, 박인숙 지음) 일찍이 깨달은 그는 아기 업은 소녀는 물론 빨래하고 절구질하던 여성들의 모습을 화면에 꾸준히 담았습니다. 이번에 ‘아기 업은 소녀’ 등 박수근 그림 18점을 기증받은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의 특별전 제목은 아예 ‘한가한 봄날, 고향으로 돌아온 아기 업은 소녀’입니다.

“작은 것들을 친절하게 봐줘라”. 장욱진의 딸(장경수)이 쓴 『내 아버지 장욱진』을 보면 장욱진은 딸에게 늘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고 합니다. 옛 우리 화가들의 그림은 형태, 빛과 색, 온도와 정서로 또 다른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기 업은 어린 누이들의 이야기도 그렇게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