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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김경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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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2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비극의 시작은 어쩌면 5년 전 그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법원의 유죄 확정판결로 26일 재수감된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재판을 볼 때마다 2016년 9월 3일 열렸던 ‘문팬’ 창립총회가 오버랩됐다. ‘드루킹 사건’은 당시 등장한 ‘선플 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선플과 드루킹은 소설 속 ‘지킬과 하이드’의 모습이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김경수 유죄의 씨앗 ‘선플 운동’ #착한 지지 취지가 조작으로 퇴화 #하이드 범죄에도 양심 느슨해져

5년 전 행사장에서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문팬과 소통과 공감의 명장면을 연출했다.

“저는 이제 SNS 공간에서 대대적인 선플 운동 같은 게 전개되어야 할 것이라고 직언하고 싶습니다. 그런 모든 분께 말씀드리고 싶지만, 우리 문팬 가족들부터 먼저 그 일을 시작하고 분위기를 선도해 나가자 그렇게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예!) 지금 SNS 공간에서 제일 겁나고 두려운 대상이 누굽니까? 바로 저 문재인 아닙니까? 저에 대해서 공격하는 거 그런 거 읽어보면 얼마나 속상하십니까? (맞아요!) 그렇게 공격하는 사람들은 꼴도 보고 싶지 않지요? 그러니 또 역지사지한다면 상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은 다른 사람들이 무례하더라도 우리 문팬부터 선도해 나가면 ‘야 정말 문재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문재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문재인도 달라 보인다’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겁니까? (예!)”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악플의 반대인 선플, 즉 착한 댓글을 주문했다. 상대를 공격하지 않고 착하고 예의 바르게 지지를 보내 달라는 얘기였다. 문 전 대표는 “문팬은 정치 문제를 지지하고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문재인을 매개로 더 좋은 정치로 만들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고 일종의 시민정치 참여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웠다.

선플 운동은 그러나, 그 취지가 점점 느슨해졌다. 목표(문재인 대통령 당선)가 수단을 정당화하면서 드루킹 일당과 ‘킹크랩’이 동원됐다. 수천개의 아이디로 기사 댓글에 ‘좋아요’나 ‘싫어요’를 클릭했다. 2분 걸리는 작업을 킹크랩은 1.2초 만에 해치웠다. 혐의가 인정된 클릭 건수는 4100만 건이라고 한다. 허익범 특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드루킹 범행이 대선에 영향을 줬다고 본다. 댓글에 공감·비공감 많은 기사를 위로 끌어올리고 그걸 본 사람들이 ‘이게 여론이구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여론 조작이다”고 말했다. ‘착한 지지’는 조작으로 퇴화했다.

서소문포럼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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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년 뒤인 지난 20일, 김경수 전 지사가 대법원에 제출한 최후진술문엔 이런 항변이 담겼다.

“왜 저를 공범으로 지목하며 자신의 사건에 끌어들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플 활동에 참여하고, 권리당원에 가입하고, 이런 일이야 지난 2017년 대선 당시 온라인 모임들에서는 정도의 차이만 있었지 어디서나 했던 일입니다. 선플 활동도 열심히 하고 경선 때 현장에 나와서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의 인사 추천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불만을 품고 앙갚음을 한 것으로만 생각하기에는 김동원의 행동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김동원에게는 이번 사건에서 자신의 잘못을 희석시킬 수 있는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킹크랩을 만들어 놓고는, 이제 와서 문제가 되니까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워서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을까.”

최후 변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둘의 공모는 인정됐다. 친문 진영의 방송인 김어준은 유튜브에서 “나는 죄를 지어도 그 사람은 죄를 지을 사람이 아니다”라며 재판부를 향해 “x놈의 새끼들”이라고 했다. 정치권에 알려진 김 전 지사의 평판이나 성품으로 볼 때, 그의 주장에 일말의 진실은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죄책은 분담되어야 하며 선플 운동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선과 악을 구분하고 통제하려던 발상은 지킬 박사의 실험을 닮았다. 선플의 이분법과 드루킹의 방법론이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김 전 지사는 하이드(드루킹)를 감당하지 못한 지킬 박사로 전락했다. 그의 항변은 하이드가 자신과는 다른 인물이라 부정하는 지킬의 외침일 뿐이다.

김 전 지사는 유죄 선고를 받은 뒤 “진실은 아무리 멀리 던져도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진영에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이드가 저지른 짓에 오싹해졌지만, 어느새 양심의 가책도 느슨해진 ‘지킬의 순간’을 경험하지 않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