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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수준 미달 대선주자 심판할 미래 세대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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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역사가 오래된 제약회사의 CEO가 들려준 얘기다. 영업직 사원을 뽑는데 명문대 출신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의 지원자에게 “정말 다닐 생각인가”라고 물었더니 “합격만 시켜주시면 뼈를 묻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요즘 젊은이들은 지옥 같은 취업의 관문을 통과한 뒤에는 ‘미친 집값’에 좌절한다. 이러니 연애·결혼이 두렵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세계 최저인 0.84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생산인구 감소가 한국 경제에 코로나19 여파보다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했다.

2057년에 바닥나는 국민연금 #청년들에게는 ‘다단계 금융사기’ #미래 없는 과거 타령에 신물난다 #유승민 홀로 미래 위해 개혁 공약

부모의 노후 대책인 국민연금도 이들에게는 ‘다단계 금융사기’일 뿐이다. 매달 보험료를 납부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받을 돈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적립금은 2042년 1774조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57년이면 바닥난다. 이창수 차기 한국연금학회 회장은 “미래세대의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여야의 유력 대선 주자들은 ‘지금과 다른 미래’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다. ‘과거’는 진흙탕 싸움을 펼칠 익숙한 무대고, 표가 쏟아지는 노다지이기 때문이다. 여권에서는 이재명 경기지사가 느닷없이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될 당시 이낙연 전 대표가 찬성했다”고 공격했다. 이 전 대표는 “반대표를 던졌다”고 맞섰다. 그러자 정세균 전 총리는 “나는 탄핵을 막기 위해 의장석을 지켰다”고 했다. 17년 전의 정치 지형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이제 와서 누가 누구를 ‘배신자’로 심판하겠다는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인 김경수 경남지사가 4년 전의 ‘드루킹 댓글 여론조작’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여론 조작은 공론장을 붕괴시키고, 선거 과정에서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교란하는 범죄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고, 여권 주자들은 김 지사를 감싸고 나섰다. “진실은 끝내 찾을 수 없게 됐다”(이재명 측), “불법적 방식을 동원할 이유도, 의지도 전혀 없었던 선거”(이낙연), “증거우선주의 법 원칙에 위배된다”(정세균), “이해가 안 가고 아쉽다”(김두관), “결백함을 믿는다”(추미애)라고 했다. 자기 성찰과 비판을 이적행위로 보고 적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포위된 요새’ 신드롬에 사로잡혀 있다. 상식과 이성이 거부당한 곳에서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유력한 야권 주자들도 미래를 소환하는 메시지를 발신하지 않는다. 그저 문 정권의 ‘과거’만 때리고 있다. 선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KAIST 원자력공학과 전공 학생, 스타트업 대표, 식당 주인, 부동산 중개업자를 만났다. 메시지는 문 정권 비판 일색이다. 윤 전 총장은 대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에 대해 “송구한 부분도 없지 않다”고 했다. 골수 야당 지지층의 반문(反文) 정서를 의식했다. “탄핵은 정당했다”고 했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난감해졌다. 그는 “탄핵의 강으로 들어가자는 취지의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과거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수록 미래는 멀어진다.

그나마 미래를 이야기하는 유력 주자는 이재명 지사다. 청년에게 연 200만원, 국민에게 100만원을 주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꺼냈다. 하지만 겨우 용돈 수준을 나눠주는데 연간 예산의 10분의 1인 57조원을 투입해야 한다. 가성비는 낙제점이고,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차라리 “국민연금 개혁을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유승민 전 의원의 공약에 믿음이 간다. ‘더 내고 덜 받는’ 개혁을 하지 않고 이대로 2057년을 맞으면 연금을 파산시키거나 소득의 30%를 연금 유지용 세금으로 내야 한다. 국민이 부담하는 총 세금이 60%로 치솟는다. 윤석명 한국연금학회장은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인기 없는 공약을 꺼낸 유승민은 미래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주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을 앞세워 ‘덜 받는 구조’로 국민연금을 개혁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5년 ‘눈덩이’ 적자로 굴러가는 공무원 연금을 ‘더 내고 덜 받는 구조’로 개혁했다. 30년간 185조원의 세금을 아끼게 만들었다. 집권당 원내대표로 여야 협상을 이끌었던 사람이 유승민이다. 노무현·박근혜는 지지율 하락을 감수하고 대통령다운 결단을 내렸다. 반면에 문 대통령은 “더 많이 주겠다”는 시대 역행의 공약을 했다. 역사는 누가 공동체의 미래를 지키려 노력했는지 평가할 것이다.

경쟁자의 전력(前歷)을 공격하거나 집권세력을 때리는 ‘과거’ 장사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백년대계를 생각하고 청년 세대의 아픔까지 살피는 ‘미래’ 경쟁의 문을 열어야 한다. 박근혜를 징벌하기 위해 따져보지도 않고 문재인을 뽑는 식의 선거는 글로벌 시대 한국의 위상에 맞지 않는 자폐적 악습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41년 전 사형선고를 받은 뒤 감옥에서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고 정보화를 구상했다. 집권한 뒤 한국을 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의 정보화 강국으로 만들었다. 부끄럽지 않은가. 주자들은 “탄핵” "백제 집권” “혜경궁 김씨” “줄리”의 신물나는 이전투구를 중단하고 각자가 준비한 공동체의 미래를 펼쳐놓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