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점 과녁 맞힌 화살 또 맞혔다, 이게 '9연패' 韓양궁 실력

중앙일보

입력 2021.07.25 17:01

업데이트 2021.07.25 18:51

여자 양궁 단체전에 출전한 강채영, 장민희, 안산 선수가 25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ROC와 결승전을 시작하면서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여자 양궁 단체전에 출전한 강채영, 장민희, 안산 선수가 25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ROC와 결승전을 시작하면서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4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양궁 혼성 단체전 준결승. 안산(20)이 쏜 화살은 이미 과녁 10점에 꽂혀있던 화살을 갈라버렸다. 과녁 정중앙의 카메라 렌즈를 깨뜨렸던 신궁 선배들의 모습을 재현했다.

40년 '양궁 최강국' 유지 비결
나이·경력 안 따지는 공정 선발
무한 경쟁, 과학적 훈련법 개발
외국 벤치마크해도 한국 독보적

이게 바로 한국양궁의 초격차(超格差), ‘넘볼 수 없는 차이를 만드는 격’이다. 경쟁국들이 한국 양궁을 벤치마크 하겠다며 한국인 지도자들을 수입한 게 십수 년 전이다. 훈련법과 전략이 노출된 후에도 한국 양국은 수성을 넘어 격차를 더 벌리고 있다.

40년째 세계 정상을 지키고 있는 한국 양궁의 핵심 키워드는 ‘원칙’과 ‘실력’이다. 코로나19 여파로 도쿄올림픽이 한 해 미뤄져 양궁 선발전은 올해 다시 열렸다. 여러 변수가 많았지만, 동등하게 경쟁해 최고를 가리자는 원칙을 허물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 어깨를 다쳤던 김제덕(17)이 참가할 수 있었다.

혼성전도 23일 랭킹 라운드에서 잘 쏜 순서대로 선발했다. 나이나 경험에 관계없이 공정한 판을 깔아주니, 막내 김제덕과 안산은 첫 올림픽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실력을 발휘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외치는 ‘공정함’과 ‘실력주의’를 한국 양궁이 보여줬다.

2000년대생 김제덕과 안산은 ‘Z세대 궁사(1995년 이후 출생자·Generation Z)’다. 큰 무대에서 위축되지 않았다. 김제덕은 큰 목소리로 “대한민국 파이팅”을 연발했다. 불처럼 뜨거운 패기에 TV 해설자도 “양궁에서 이런 선수를 본 적 없다”며 놀랐다.

혼성전 첫 세트를 내주고도 뒤집은 안산은 얼음처럼 차갑다. 심박 수 측정 때 가장 진폭이 적었다는 안산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의지만 있으면 못할 것 없다”. 치열한 선발전에도 ‘한 판 제대로 붙어보고 안 되면 또 도전하면 된다’는 그의 배포가 특유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만들었다.

여자 양궁대표 안산이 25일 일본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 경기에서 활을 쏘고 있다.

여자 양궁대표 안산이 25일 일본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 경기에서 활을 쏘고 있다.

한국 양궁은 1972년 뮌헨올림픽 이후 금메달 42개 중 25개를 휩쓸었다. 통산 2위 미국(8개)과 격차도 매우 크다. 강산이 네 번 바뀌도록 최정상을 지키는 비결은 뭘까. 체육 철학자인 김정효 서울대 외래교수는 “활은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다.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는 수행의 하나”라며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명궁 DNA’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게 올림픽에서 우리가 양궁 주도권을 쥐게 된 배경이며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격’”이라고 설명했다.

양궁 초격차의 가장 큰 원동력은 ‘노하우의 축적’이다. 이기는 법을 아는 것이다. 어떤 훈련이 필요하고, 어떤 멘털이 요구되는지 수십년간 우승을 통해 축적해왔다. 대한양궁협회와 코칭스태프는 대회가 끝날 때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런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감독, 코치, 선수가 바뀌어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엄청난 훈련량과 과학적 훈련법도 한국 양궁의 오랜 전통이다. 선수들은 선발전에서만 수천 발의 활을 쐈다. 가장 뛰어난 선수들끼리 경쟁하다 보니 훈련 효과가 자연스럽게 커졌다.

양궁협회는 올림픽을 앞두고 1억5000만원을 들여 진천선수촌에 ‘도쿄 쌍둥이 세트’를 설치했다. 도쿄만 인근에 있는 유메노시마 양궁장과 비슷한 전남 신안군 자은도에서 특별훈련을 했다. 만약에 대비해 지진 상황 대처법도 연습했다. 훈련일에 비가 쏟아져도 “궂은 환경에 적응할 기회”라며 반기는 게 양궁 대표팀이다. 회장사인 현대차 그룹과 협업해 인공지능(AI) 영상 분석을 활용했고, 선수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명상 훈련용 앱도 개발했다.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한국 양궁의 이념이 공정함이다. 2016년 리우올림픽 때까지만 해도 양궁 국가대표 8명에게 1차 선발전 자동출전권을 줬다. 지금은 그 작은 특혜마저 없애고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한다. 세계 1위든, 메달리스트든 동일한 출발선에 선다. 초·중·고교를 포함한 양궁 선수가 2000명도 되지 않지만, 이런 시스템 덕분에 한국 양궁은 특정 선수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대표 선수 모두가 에이스인 것이다.

양궁협회 관계자는 “공정하게 선수를 뽑느라 선발전이 너무 길어졌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결국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훈련 효과도 컸다”고 말했다. 일본으로 귀화한 하야카와 렌(한국명 엄혜련)은 “한국에선 양궁을 잘했던 사람들이 지도자를 하는 등 시스템이 잘돼 있다. 한국 선수는 고교 졸업 후 대학이나 실업팀에 갈 수 있지만, 일본은 대학까지만 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정효 교수는 “요즘 젊은 세대가 가장 절망하는 게 절차의 정의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스포츠에서 선수 선발은 그 절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어야 한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단일팀을 구성할 때 ‘절차 없음’이 반감을 산 거다. 반대로 계급장 떼고 실력만으로 선발되는 양궁의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박린, 김효경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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