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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전 ‘검은 주먹’, IOC에 “선수들 무릎꿇기 전면 허용하라”

중앙일보

입력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남자 육상 200m 시상식에서 토미 스미스(가운데)와 존 카를로스(오른쪽)가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남자 육상 200m 시상식에서 토미 스미스(가운데)와 존 카를로스(오른쪽)가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1968년 10월 16일 멕시코시티올림픽 남자 육상 200m 시상식. 미국 국적의 흑인 금메달리스트 토미 스미스(당시 24세)는 동메달을 딴 동료 존 카를로스(당시 25세)와 함께 검은 장갑과 검은 양말을 착용한 채 연단에 올랐다. 그들은 미국 국가가 나오자 장갑 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흑인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는 이른바 ‘블랙 파워’ 메시지를 담은 시위였다. 검은 장갑은 흑인의 단결을, 신발 대신 신은 검은 양말은 흑인의 빈곤을 상징했다. 이후 이들은 올림픽 정신에 맞지 않는 정치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선수촌에서 추방됐다.

68년 인종차별 항의 금메달리스트 #이번엔 '정치적 표현' 허용 요구 #"침묵은 불평등을 수용하라는 것" #

‘블랙 파워 설루트’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된 토미 스미스가 2020 도쿄올림픽을 위해 최근 다시 한번 나섰다. 23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스미스를 포함한 전·현직 스포츠 스타 150여 명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스포츠 선수의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라”는 취지의 공개서한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토미 스미스(오른쪽)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모습. [스미스 인스타그램]

토미 스미스(오른쪽)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모습. [스미스 인스타그램]

논란의 시작은 IOC가 이달 초 “어떤 종류의 시위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올림픽 헌장 50조를 일부 완화하겠단 방침을 재확인하면서 불거졌다. IOC는 경기 시작 전 선수를 소개할 때나 기자회견 등에선 정치·종교·인종적 표현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언뜻 진일보한 방침으로 보였지만, 메달 시상식 등 공식적인 자리에선 이런 행동이 전면 금지됐다.

스미스 등은 서한에서 “스포츠맨을 비롯한 모든 사람은 인종차별 등 사회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며 “중립을 지키라는 것은 침묵하라는 것이고, 이는 불평등을 수용하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최근 IOC가 발표한 규정에 대해서도 “사회적 변화에 한참 못 미친다”고 강조했다.

21일(현지시간) 도쿄올림픽 여자축구 조별리그 E조 1차전에 참가한 영국 여자축구대표 선수들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21일(현지시간) 도쿄올림픽 여자축구 조별리그 E조 1차전에 참가한 영국 여자축구대표 선수들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서한을 보낸 뒤 스미스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미국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첫 올림픽인 만큼 많은 선수가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앞서 21일(현지시간) 영국·칠레·미국·스웨덴 여자축구팀은 흑인 탄압에 반대하는 무릎을 꿇는 시위를 벌였고, 미 여자 해머던지기 선수 그웬 베리도 지난달 26일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성조기를 외면하고 ‘행동하는 운동선수’란 티셔츠를 올려 보이기도 했다. 스미스는 이같은 후배들의 행동에 대해 “매우 뛰어나고 도전적인 행동이었다”고 평가했다.

지난달 26일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미 여자 해머던지기 선수 그웬 베리(왼쪽)는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국가가 나오는 동안 성조기를 외면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6일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미 여자 해머던지기 선수 그웬 베리(왼쪽)는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국가가 나오는 동안 성조기를 외면했다. AP=연합뉴스

미국 텍사스주에서 12명 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스미스는 어린 시절 폐렴을 심하게 앓았다. 하지만 학창시절 이를 극복하고 육상과 미식축구, 농구 등 운동에 두각을 보였다. 육상에 본격 전념한 것은 새너제이 주립대에 진학한 뒤였다. 운동밖에 모르던 그는 사회학 교수 해리 에드워즈를 만나면서 인권 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에드워즈 교수와 함께 한 프로젝트 ‘인권을 위한 올림픽(Olympic Project for Human Rights)’의 일환으로 멕시코올림픽에 집단 보이콧을 시도했지만 반대 여론에 부딪혔고, 결국 200m 경기에 출전해 19.83초의 세계 기록을 세웠다. 이때 벌인 것이 검은 장갑 시위였다.

현역 시절 토미 스미스. 그는 1968년 올림픽에서 남자 200m 육상 경기에서 19.83초의 세계 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스미스 인스타그램]

현역 시절 토미 스미스. 그는 1968년 올림픽에서 남자 200m 육상 경기에서 19.83초의 세계 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스미스 인스타그램]

스미스는 2007년 펴낸 자신의 저서 『침묵의 제스쳐(Silent Gesture)』에서 시위 뒤 수차례 암살 협박에 시달렸다고 털어놨다. 오랫동안 숨어지냈던 그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스미스는 1978년 미국 육상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2005년엔 모교인 새너제이 주립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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