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입장은 없습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벌어졌던 ‘여론 조작 사건’으로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유죄 판결을 받은데 대한 청와대의 공식 입장이다.
야권이 “대통령의 사과”를 비롯해 일부에선 ‘대통령 하야’, ‘탄핵’까지 거론하며 총공세에 나섰지만, 청와대는 이 ‘11글자'만 내놓았다.
김 전 지사는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수행ㆍ보좌ㆍ대변하는 ‘1인 3역’ 이상의 역할을 했던 최측근이다. 이와 관련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 거대한 범죄를 수행비서가 단독으로 저질렀을 리가 만무하다. 몸통은 문 대통령과 민주당”이라며 “선거 개입을 넘어 선거 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준석 대표는 야당 대표 시절 문 대통령이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청와대가 사과해야 한다”고 했던 사실을 언급하며 “구(舊) 문재인과 현(現) 문재인을 대비해 조롱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즉각적 사과를 부탁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문 대통령의 사과는 없었다.
지난 4년간 문 대통령의 사과엔 패턴이 있다. 요약하면 과거 정부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선 이례적일 만큼의 파격적 사과를 해온 반면, 현 정부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선 사과에 극도로 인색했다는 경향성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임기 말에 와서 보다 강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 대통령은 최근 부동산 투기로 물러난 김기표 전 반부패비서관 등 인사 관련 논란을 비롯해, 코로나 대유행에 대한 책임 논란, 사상 초유의 청해부대원 집단 코로나 감염 사태, 김 전 지사의 유죄 판결 등을 거칠 때마다 야권의 사과 요구를 받고 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직접 사과에 극도로 인색한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책임을 관련 부처나 참모들에게 전가하거나, ‘개인이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해명이 제시됐다.
인사 논란 때는 김외숙 인사수석 등 인사라인, 궁극적으로 인사권자인 문 대통령에 대한 책임론이 일었다. 문 대통령은 침묵했고, 청와대는 “인사라인 전체가 함께 책임질 문제”라며 김 수석을 감쌌다. 그리나 지금까지 인사실패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코로나 확산에 대한 책임을 놓고 기모란 방역기획관의 책임론이 불거졌지만 청와대는 “방역의 컨트롤타워는 중층적이고, 기 기획관은 컨트롤타워와 청와대의 가교”라며 그를 감쌌다. 이 발언은 세월호 사고를 경험했던 문 대통령이 “청와대가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하는 말도 있었는데, 중대한 재난의 경우 청와대가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할 도리가 없다”고 했던 원칙까지 뒤집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청해부대원 집단감염에 대해서는 문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다. 그런데 국군통수권자인 문 대통령은 사과 대신 “군이 나름대로 대응했지만, 국민의 눈에는 부족하고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며 책임을 군에 돌리는 듯한 발언을 했다. 논란이 일자 청와대는 “‘겸허히 수용한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이 사실상의 사과”라고 주장했다.
그러다 지난 23일 “대통령이 책임을 떠넘긴다”는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나서야 “부대원들이 건강하게 임무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 걱정하실 가족들에게도 송구한 마음”이라는 SNS 글을 올렸다. 부대원들의 감염사실이 확인된지 8일만에 이뤄진 ‘페이스북 사과’였다.
문 대통령이 지금까지 이번 정부 때의 실책에 대해 사과했던 것은 손에 꼽힌다.
문 대통령은 부동산 정책과 관련 “부동산은 자신있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결국 올해 초에야 “송구한 마음”이라고 했다. ‘조국 사태’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징계와 관련해서도 조 전 장관의 경질과 윤 전 총장에 대한 징계 실패가 이뤄지고 나서야 ‘송구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과거 정부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신 사과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5ㆍ18 유가족, 가습기 피해자,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난 뒤 “국가의 잘못을 반성하고 책임을 약속하고 아픔을 나눴다”고 밝혔다. 위안부 할머니를 초청한 자리에선 “할머니들의 의견도 듣지 않고 할머니들의 뜻에 어긋나는 합의를 한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했다. 모두 박근혜 정부 때 발생했던 사건들이다.
문 대통령은 제주 4ㆍ3과 관련해서도 “국가 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고, 베트남을 방문해서도 “양국간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했다.
정치권에선 임기 말이 될수록 강해지는 문 대통령의 인색한 사과와 관련 “내년 대선을 앞둔 지지층 결집을 염두에 둔 의도적 움직임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야권의 사과 요구 등을 정치공세로 돌려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22일 발표된 엠브레인퍼블릭ㆍ케이스탯리서치ㆍ코리아리서치ㆍ한국리서치 4개 업체의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46%를 기록했다.(95% 신뢰수준ㆍ표본오차 ±3.1%pㆍ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문 대통령의 임기말 지지율 고공행진과 관련 이철희 정무수석은 방송 인터뷰에서 “지지율 40%인 대통령과 척져서는 (여당에서) 누구도 다음 대선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