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박정희 면전 '각설이 타령'…다음날 헌병 백차 왔다"

중앙일보

입력 2021.07.24 00:10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21〉 군 감옥 갈 뻔한 사연

1975년 군 지휘관을 접견하는 박정희 대통령. 맨 왼쪽이 당시 서종철 국방장관. 그 옆이 노재현 합참의장으로 보인다. [중앙포토]

1975년 군 지휘관을 접견하는 박정희 대통령. 맨 왼쪽이 당시 서종철 국방장관. 그 옆이 노재현 합참의장으로 보인다. [중앙포토]

이렇게 뜨거운 여름은 내 칠십 평생 첨이다. 거기다 코로나까지 극성을 부리던 지난 주말 나는 오랜만에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다. CBS 기독교 방송국 매일 오후 6시 25분에 신설 방송하는 ‘한판승부’라는 제목의 프로그램(PD 손명회) 섭외가 되었던 건데 내가 선선하게 OK를 시킬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프로그램 패널 중에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출연한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 애창곡 ‘황성옛터’ 대신
최고 선물하려 ‘각설이타령’부터
“황성옛터에 …” 가사 까먹어 퇴장

헌병대 “각설이가 누구냐” 심문
대학 동창 법무장교 “정치색 없다”
남한산성 군 감옥행 간신히 면해

그렇지 않아도 나는 진 교수에게 일방적인 신세만 지고 변변히 고맙다는 인사도 표시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5년 전 2016년 내가 미술 대작 사건으로 한국 미술계로부터 하룻밤 사이에 파렴치한으로 몰렸을 때, 그리하여 결국 재판정에 들어서는 입장이 되었을 때 포화가 난무하는 인터넷 전쟁터에서 질식사 직전까지 몰린 피고인 조영남을 위해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 쨍강쨍강 싸우는 외로운 장수가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진중권이다.

진중권, 미술 대작 1심 재판 때 정교한 증언

그리하여 1심 재판 때 나는 어렵게 진 교수의 연락처를 알아내 조심스럽게 내 재판 때 증언자로 나올 수 있느냐 타진했고 놀랍게도 진 교수로부터 흔쾌한 답변을 받아냈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나는 진 교수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인사를 나눈 적도 없고 밥 한번 먹은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렇다.  진 교수와 생전 처음 만나 악수를 한 것은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3층 재판정 복도에서였다. 멋졌다. 1심 재판 때 증언석에 앉은 진 교수의 피고인 조영남에 관한 방어 논리는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 ‘붓으로 색을 칠해 그리는 것이 미술이다.’ 이건 100년 전에 끝난 얘기다. 지금은 생각의 시대, 개념의 시대다. 조수가 화투를 그려달라는 작가의 지시에 따라 그렸다면 그건 조수의 그림이 아니고 작가 조영남의 그림이다. 1000원이건 1만원이건 조수가 돈을 받았다면 당연히 그림의 임자는 돈을 준 작가다.”

이렇게 명쾌한 미술 전문가가 증언을 해주었으니 당연히 재판은 우리 쪽으로 기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진중권 교수의 반론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1심 재판의 결과는 유죄였기 때문이다. 징역 10개월에 2년의 집행유예 결과가 나왔다.

오늘의 내 얘기는 지금부터다. 중앙SUNDAY 식구들에게 드리는 경험자의 얘기다. 간단히 말해 판사님 앞에선 진중해야 된다(진중권이 아닌 그냥 진중). 나는 상대 쪽에서 내가 미술학원이나 미술대학 근처도 못 가본, 더구나 미술협회에 등록도 안 된 자격 미달의 인물이 미술계를 어지럽힌다는 원고 측 증언이 너무 어이없어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즉시 나는 재판장님으로부터 “피고는 웃지 마시오”라는 경고를 받게 됐고, 진 교수의 증언이 아무런 효과를 못 거둔 이유는 너무 자신만만한 나머지, 때가 어떤 때인데 그럼 이순신 장군이 망치를 들고 거북선을 직접 만들었겠느냐는 식으로 검사님과 판사님이 주눅이 들게 몰아간 것이 1심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 쫄딱 망한 것이다. 그로부터 대오각성 진중하게 끌고 가 2심 고등법원에서 무죄, 3심 대법원에서 무죄로 끝을 내긴 했다.

뒤돌아보면 나는 콧방귀, 입방정, 경솔한 말 한마디를 잘 못 하는 바람에 여러 번 쫄딱 망하고 쪽박 차는 일이 벌어졌다.

최근 CBS 시사 프로그램 ‘한판승부’에 출연해 진중권씨를 만난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최근 CBS 시사 프로그램 ‘한판승부’에 출연해 진중권씨를 만난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신고산타령’을 ‘와우아파트 타령’으로 바꿔 불러 새벽에 홍성 법원으로 끌려간 것도 그랬고, 우쭐대면서 육군 참모총장 출근차에 ‘승전’ 경례를 붙였다가 조사받게 된 것도 그랬고, 대통령 앞에서 ‘황성옛터’ 대신 ‘각설이타령’을 불러 남한산성 군 감옥 문턱까지 간 것도 그랬다. 그뿐 아니다. 나는 겁 없이 일본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책을 내고 국제적 인터뷰를 하다가 2년간이나 유배 생활에 처해진 것도 그랬고, 5년 전 미술대작 사건 와중에 자신만만하게 “내 그림이 떫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내 그림 다 가져와라. 환불해주겠다” 해서 밀려 들어오는 그림을 몽땅 환불해 주느라고 쫄딱 망해(나는 설마 환불해달라는 사람이 있으랴 싶었는데) 하나 남아 있는 아파트까지 날릴 뻔한 일도 그런 거다. 또 있다. 노태우 대통령 부부 앞에서 실없는 얘기를 했던 일도 그렇다. 최근 윤여정 여사가 아카데미상을 탈 때 기자들이 나한테 소회를 물어와 우아하게 몇 마디 했다가 국민 밉상으로 몰렸던 일. 그 일은 정말 억울하다. 기자들이 전화해 왔을 때 “저는 우리나라에 그 정도로 훌륭한 여배우가 있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이렇게 잡아떼란 말인가.

“예? 쓰잘데기 없는 얘기 그만하고 대통령 앞에서 ‘각설이타령’ 부른 얘기나 하라구요?”

예예 알겠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부하겠습니까.

나 때에는 육군 감옥이 남한산성에 있었다(지금은 경기도 이천시). 내가 조치원 훈련소에서 6개월 훈련을 마치고 육군본부로 올라왔을 때다. 어느 날 중대장으로부터 육본 참모장 김창범 소장 앞으로 가보라는 전갈을 받는다. 여느 행사에는 대대장이나 본부 사령 김경순 준장의 지시를 받으면 그만이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뭔가 매우 중요한 행사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며칠간에 걸쳐 김 소장님과 나 사이에 치밀한 각본이 짜여졌다. 노래 순서는 ‘황성옛터’ ‘제비’ ‘딜라일라’. 나는 무슨 행사인가 누가 참석하는 행사인가를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여기는 군대다. 밥풀때기 달랑 하나를 어깨에 단 최하의 졸병이 어휴, 별을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나 다신 소장님께 그런 질문 따위는 어림 반푼어치도 안 되는 얘기다.

“각하 좋아하는 노래 불러” 참모장 말에 철렁

드디어 D-데이가 왔다. 나는 그저 기타를 움켜 안고 차례를 기다렸다. 내 차례가 왔다는 신호를 받고 나는 무대 위로 걸어나갔다. 앗! 그것은 아찔한 순간이었다. 별들이 반짝반짝 은하수처럼 보였다. 무대 조명이 비치면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육척장신으로 키가 엄청 큰 우리의 서종철 참모총장. 역시 키가 훌쩍 큰 노재현 참모차장 사이에 요철 모양으로 폭 내려앉아 있는 저 얼굴 까만 사람은 누구인가. 그렇다. 그분은 다름 아닌 박정희 대통령이셨다. 아! 나는 지금 임금님을 실물로 처음 뵙게 되는 영광의 순간이다. 나는 우선 “승전!”이라는 구호를 벼락같이 외치며 거수경례를 올렸다. 순간 나는 퍼뜩하며 예의 머리를 굴렸다. ‘나는 지금 임금님 앞에 섰다. 그렇다. 나는 왕의 남자가 되어야 한다.’ 왕의 남자가 되려면 어때야 하는가. 딱 한 가지다. 최고의 노래를 선물해야 하는 것이다. ‘황성옛터’ 따위의 고리타분한 노래로는 최고의 노래 선물이 못 된다. 획기적인 노래를 불러야 한다. 나는 기타의 A 마이너 코드를 쫭! 내려 긁었다. 그리고 ‘각설이타령’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최상의 노래다. ‘아리랑’과 거의 맞먹는 노래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아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일자나 한 자를 들고나 봐, 일선에 가신 우리 낭군님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 이자나 한 자를 들고나 봐, 이승만씨가 대통령일 때 부통령에는 본관이었다. 얼씨구씨구…”. 여기까지는 박장대소가 나오고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나 오자 육자를 지나면서부터 분위기가 급랭하는 느낌이 들었다. 육자 칠자에서 끝날 수는 없다. 최소 십자까지는 가야 한다. 이때다. 김창범 소장님이 무대로 직접 올라와 노래를 하는 내 귀에다 대고 “조 일병! 각하가 좋아하시는 ‘황성옛터’로 빨리 불러” 하시는 것이다. 순간 나는 ‘아! 나는 망했구나. 아! 나는 또 죽었구나’ 하면서 각하가 좋아하신다는 ‘황성옛터’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미 내 온몸이 굳어져 왔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면 별빛만 고요해해에~.” 앗! 그런데 다음 가사가 생각이 안 난다. 그래서 다시 첨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또 그 자리에서 끊어졌다. 삼세번이면 되겠지 하고 다시 불렀는데 역시 가사가 안 풀렸다. 평소엔 가사를 까먹으면 다른 가사로 즉시 둘러대거나 ‘보리밭’이나 ‘딜라일라’를 불렀으면 아무 탈 없는 건데, 언어 능력 상실 상태였다. 김 소장님이 다시 내 곁으로 와 “조 일병 들어가” 해서 퇴장하게 된다.

다음 날 아침 여지없이 헌병 백차가 기상나팔 소리와 동시에 들이닥쳐 나를 헌병대로 끌고 갔다. 헌병 장교로부터 직접 심문이 이어졌다. 두 가지로 요약되었다. 하나는 왜 대통령의 신청곡 ‘황성옛터’를 세 번이나 거부했는가. 다른 하나, 이것이 쟁점이다. 내가 부른 각설이 타령 중에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과연 누구를 의미하는가 하는 거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내가 막 버벅대고 있을 때 마침 중위(대위였는지 모르겠다)로 배석했던 신참 법무장교가 서울대 출신 내 동창(황씨 성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중에 부장판사가 됨)이었는데, 고참 장교한테 “쟤는 무슨 정치색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쟤는 제가 잘 압니다. 그냥 똥 된장을 못 가릴 뿐 다른 저의가 없는 친굽니다. 저희들이 완전 책임지겠습니다” 해서 남한산성 감옥행을 간신히 면한다. 그 후에 뒤늦게 알았다. 우리 대통령은 매해 한 번씩 관례상 육군회관에 들르신다는 것이었다. 하! 내가 무슨 수로 그런 걸 알고 있었으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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