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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9] 단종, 폭염에 700리 유배길…뱃길 대신 고갯길 넘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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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6호 24면

딱 이맘때였다. 이런 무더위였다. 1457년 6월 22일(양력 7월 13일)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단종이 유배를 떠난 날이었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선돌. 단종은 유배길 마지막날 유배지인 영월읍 청령포로 향하면서 이 근처를 지나갔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선돌. 단종은 유배길 마지막날 유배지인 영월읍 청령포로 향하면서 이 근처를 지나갔다. 김홍준 기자

단종은 50여 명과 유배지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향했다. 물길을 헤쳐나가다가 뭍에 올랐다. 이후 수십 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준 지 2년 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실패 1년 뒤였다.

■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9> #단종이 넘었다는 고개 ‘행치’ 세 곳 #열흘간 700리…유배지 청령포에

『단종의 비애, 세종의 눈물』을 쓴 유동완 작가는 “단종 유배길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정사, 야사에 없다”며 “하지만 지명 설화를 통해 그 행로를 더듬어 볼 수 있다”고 했다. 경로 중에는 유 작가가 주목한 ‘행치’라는 고개가 있다.

# 행치(幸峙)냐 행치(行峙)냐
‘행’은 임금의 거둥과 관련한 단어에 종종 붙는다. 행행(幸行·임금이 대궐 밖으로 나섬), 행궁(行宮·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이 그렇다. 높은 사람의 외출을 뜻하는 행차(行次)도 있다.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임금의 거둥을 높여 부를 때는 행(幸)을 썼기 때문에 행치(幸峙)라고 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장에는 행치(行峙)라고 표기한 곳도 있다. 단종이 700리(280㎞) 유배길에 넘어가던 수십 개의 고개 중 행치는 세 곳이다.

단종은 이런 고갯길을 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유배길은 물길로 잡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서가 있다. 당시 영월로 가기 위해서는 큰길인 관동대로(한양~원주~강릉~울진 평해)를 따라가다가 원주에서 지선 격인 평구도로 갈아타면 됐다. 그러면 기거하던 창덕궁에서 흥인지문으로 나서 구리, 남양주로 가야 했다.

단종(1441~1457)이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 가면서 넘은 고개가 있다. 훗날 사람들은 이 고개를 임금이 넘어갔다 하여 행치고 불렀는데,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고개는 여럿이다. 사진은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옥촌3리에서 장풍리로 넘아가는 고개로, 단종 유배길의 첫 번째 '행치'가 된다. 김홍준 기자

단종(1441~1457)이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 가면서 넘은 고개가 있다. 훗날 사람들은 이 고개를 임금이 넘어갔다 하여 행치고 불렀는데,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고개는 여럿이다. 사진은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옥촌3리에서 장풍리로 넘아가는 고개로, 단종 유배길의 첫 번째 '행치'가 된다. 김홍준 기자

단종(1441~1457)이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 가면서 넘은 두 번째 행치.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상구리에서 북내면 상교리의 경계에 있다. 김홍준 기자

단종(1441~1457)이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 가면서 넘은 두 번째 행치.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상구리에서 북내면 상교리의 경계에 있다. 김홍준 기자

 단종(1441~1457)이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 가면서 넘은 세 번째 행치.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간매리에서 부평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김홍준 기자

단종(1441~1457)이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 가면서 넘은 세 번째 행치.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간매리에서 부평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김홍준 기자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이렇다. ‘노산군이 영월로 떠나가니, 임금이 환관 안노에게 명하여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였다(세조 3년 6월 22일).’ ‘내시부 우승직 김정을 보내어 노산군에게 문안하였다(세조 3년 6월 23일).’ 이는 단종이 화양정(광진구 화양동)을 거쳐 어디선가 하루 묵었다는 말이다. 근처 자양동에 태종의 행궁이 있었으니, 그곳이 유력하다. 단종은 한강 쪽으로 향한 것이다.

이후 단종의 행방은 묘연하다. 실록에서는 7월 5일에야 세조가 ‘노산군이 일용할 비용을 곡진하게 마련할 것을 강원도 관찰사에게 명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 작가는 “단종 유배 일행은 6월 23일 광나루에서 배를 이용해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밝혔다. 그는 “물길을 이용한 이유는 단종의 행로를 백성들에게 최대한 노출하지 않으려는 세조의 의도”라고 주장했다.

1457년은 가뭄이 심했다. 실록에서는 이 해 가뭄·한발·한해·한재라는 단어가 20회, 기우제 기록이 9회 등장한다. 더위도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각 고을의 수령들이 단종에게 얼음을 바치게 명했다. 가뭄은 배가 상류로 가는 길을 막았다. 수심이 얕아진 것이다.

단종 유배길.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단종 유배길.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유 작가는 단종의 유배 일정을 열흘로 봤다. 7일간으로 알려진 것과 차이가 난다. 유 작가는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소강(溯江)은, 바람을 등지고 가도 하루 20㎞ 이상 진행이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 여주시사는 마포나루에서 여주나루까지 약 90km 거리를, 바람을 뒤에서 받아도 4~5일 걸렸다고 적고 있다. 단종의 뱃길인 광나루~이포나루는 55㎞다. 행궁에서 하루를 묵은 뒤 사흘에 걸쳐 이포나루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엿새간 육로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포나루터 표지석은 단종이 그곳에서 멈췄음을 설명한다. 역시 설화다. 이포나루 근처의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에는 단종과 관련된 설화가 꽤 있다. 설화는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실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단종 연구자인 이승민(건국대 박사 과정)씨는 “단종 유배길은 설화를 근거로 했다”면서도 “설화는 100%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란 알맹이 위에 씌워진 것으로, 단종에 대한 지역 설화는 그가 그곳을 지나갔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단종의 유배길이 청령포까지 점점이 이어진다. 우선 거치라리. 단종이 ‘거쳐 갔다’는 마을이다. 그 옆 옥촌3리에 행치골이 있다.

# 어수정·단정…단종이 무더위 피한 곳
“네? 뭐라고? 무슨 치?”
지난 14일 여주 대신면 옥촌3리 마을회관 앞. 남궁액(85)씨는 잘 안 들린다며 큰 소리로 말하라고 했다. 덕분에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나왔다. 그들 중 연로한 한 명이 말했다. “아, 행치. 저기 집 옆길로 넘어가면 장풍리로 이어지는 길이 있소.”

이곳의 박종득(66) 이장은 “행치는 임금이 지나갔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약수터의 물도 임금의 피부병을 낫게 했다고 전해진다”고 밝혔다. 그는 “주변의 기운이 영험해, 포크레인 기사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가 다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고갯길 반은 아스팔트, 반은 흙이다.

상구리 어수정(御水井)은 단종이 무더위에 물을 마시고 지나갔다는 우물이다. 단종은 다시 고개를 만났다. 두 번째 행치다. 대신면 상구리에서 북내면 상교리로 이어지는 고개다. 이번엔 번듯한 도로다. 서쪽으로 뒤돌아보면 고달사지가 보인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물미묘원 밑 어음정은 단종이 유배길에 물을 마시며 쉬어간 곳이다.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 어수정도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곳이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물미묘원 밑 어음정은 단종이 유배길에 물을 마시며 쉬어간 곳이다.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 어수정도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곳이다. 김홍준 기자

그런데 이 행치가 ‘행차고개’에서 와전됐단다. “단종께서 강원도로 귀양을 가시다가, 요 아래 어수정에서 물을 잡수시고 이리 가셨대요. 우리 마을로. 요기, 행차고개야. 임금님이 내려와서 행차 아녀?” 여주시사에 실린, 상교리 주민과의 인터뷰 대목이다. 1989년에 발간한 『여주군지』의 ‘고달사지’ 부분에는 ‘행치는 행차고개의 와전’이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단종이 유배지인 청령포로 향하면서 이곳을 지나갔다는 말이 전해지는 건 확실하다.

세 번째 행치는 앞서 2개의 행치와 뚝 떨어져 있다. 완전한 흙길. 현재 접근은 발길로만 가능하다. 여주 강천면 마감산(388m)에 올라가야 한다. 여주온천 건너편 등산로 입구로 해서 능선을 따라 뚝갈봉을 지나야 한다. 이곳이 행치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있다. 원래는 간매리와 부평리를 잇는 고개였으나, 고갯길에는 숲이 뒤덮었다. 유 작가는 “간매리, 부평리 어느 쪽에서도 올라올 수 없을 정도”라고 밝혔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고개는 고개일까. 이름만 남길 뿐이다. 단종이 세 번째 행치를 넘은 날인 6월 27일, 조정은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의 역모설로 들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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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넘었던 고개는 시작에 불과했다. 원주에서 좀재·염터고개(부론면)를 지나면 단정(端亭)이 있다. 폐교된 단강초등학교의 교목인 수령 600년 느티나무는 단종이 더위를 피해 쉬었다는 곳. 여기에 정자가 있었는데 단정이라고 했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에는 단정(端亭)이 있다. 단종이 유배길에 현재 폐교된 단강초등학교 내 느티나무에서 더위를 피했는데, 후에 정자를 지으면서 단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단강리의 '끝정자 마을'은 이 단정에서 유래한다. 단강리는 마을 앞 강이 비가 오면 물이 붉게 변한다 하여 붙은 단강(丹江)에서 따온 이름이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에는 단정(端亭)이 있다. 단종이 유배길에 현재 폐교된 단강초등학교 내 느티나무에서 더위를 피했는데, 후에 정자를 지으면서 단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단강리의 '끝정자 마을'은 이 단정에서 유래한다. 단강리는 마을 앞 강이 비가 오면 물이 붉게 변한다 하여 붙은 단강(丹江)에서 따온 이름이다. 김홍준 기자

뱃재(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충북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 운학재(백운면), 싸리치(신림면)도 넘어야 했다. 지난 14일 싸리치. “매일 이렇게 싸리치에 와요. 싸리치 찍고 오면 딱 1만 보가 되더라고요. 단종도 넘어갔다지요?” 75세 박모씨는 고개 밑 신림리에 산다고 했다. 설화는 이어진다. 길도 이어진다.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와 충북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 경계에 있는 뱃재(사진 가운데 능선이 움푹 드어간 곳). 마을 사람들이 유배 가던 단종에게 큰절을 올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와 충북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 경계에 있는 뱃재(사진 가운데 능선이 움푹 드어간 곳). 마을 사람들이 유배 가던 단종에게 큰절을 올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영월 주천강을 옆에 끼고 있는 고개 군등치(君登峙)는 단종이 유배지 청령포로 향하던 중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수행원이 ″오늘부터 군등치라고 부르겠습니다″고 답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노산군이 된 단종이 오른 곳이라는 뜻이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영월 주천강을 옆에 끼고 있는 고개 군등치(君登峙)는 단종이 유배지 청령포로 향하던 중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수행원이 ″오늘부터 군등치라고 부르겠습니다″고 답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노산군이 된 단종이 오른 곳이라는 뜻이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와 서면 광전리의 경계에 있는 배일치는 단종이 유배길에 해가 지는 서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와 서면 광전리의 경계에 있는 배일치는 단종이 유배길에 해가 지는 서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김홍준 기자

영월 땅의 첫 고개인 솔치, 노산군이 올랐다 해서 이름 붙은 군등치, 단종이 서쪽의 지는 해를 보고 절했다는 배일치가 줄줄이 있다. 고갯길은 88번 지방도로와 겹친다. 한적한 길이다 보니 나무와 풀은 함부로 도로를 침범하고 있다.

소나기재는 청령포 직전의 고개다. 남면 북쌍리와 영월읍의 경계에 있다. 북쌍리에 옥녀봉이 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옥녀봉은 이곳 사람도 잘 몰라요.” 옥녀봉 앞 ‘잠수교’에서 만난 신세묵(60)씨가 전한 말이다. 옥녀봉은 단종이 왕비인 정순왕후처럼 단아하고 단정하다며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북쌍리의 옥녀봉. 단종이 왕비 정순왕후처럼 다소곳하다며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영월군 남면 북쌍리의 옥녀봉. 단종이 왕비 정순왕후처럼 다소곳하다며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김홍준 기자

단종은 소나기재에 오르지 않고 건너편 강변에서 70m 우뚝 선 선돌을 올려봤을 게다. 선돌 건너편 강변이 청령포로 가는 데 용이하니, 단종 일행은 그쪽을 이용했을 것이다. 지난 13일 불볕 더위 속, 그 강변의 밭에는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단종은 청령포에 들어갔다. 홍수로 인근 관풍헌에서 몸을 피한 단종은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청령포에 도착한 지 4개월 뒤였다.

1457년 한여름. 극심한 가뭄과 폭염 속에 유배길에 오른 단종은 열흘 만에 강원도 영월읍 청령포에 도착했다. 하지만 홍수 우려로 영월읍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 단종은 그곳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김홍준 기자

1457년 한여름. 극심한 가뭄과 폭염 속에 유배길에 오른 단종은 열흘 만에 강원도 영월읍 청령포에 도착했다. 하지만 홍수 우려로 영월읍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 단종은 그곳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김홍준 기자

단종이 강원도 영월군 남면의 청령포(淸冷浦). 단종의 유배 생활을 묘사한 마네킹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단종이 강원도 영월군 남면의 청령포(淸冷浦). 단종의 유배 생활을 묘사한 마네킹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단종이 유배를 떠나면서 환관 안노에게 이랬단다. “성삼문의 역모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세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역사는 권력자의 의지대로 쓰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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