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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리 하이웨이와 전두환 공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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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리 하이웨이(Lee Highway)는 버지니아를 대표하는 도로 중 하나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을 이끌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

수도인 워싱턴과 맞닿은 동쪽 알링턴부터 셰넌도어 국립공원이 있는 서쪽 끝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모두 리 하이웨이다. 비록 패장이어도 훌륭한 인품을 가진 명장이었다는 평가 덕에 1922년 그의 이름이 이 길 위에 붙었다. 버지니아 출신이란 점도 반영됐지만, 흑인의 투표권을 반대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꼬리표 때문에 이 길은 늘 논란이 됐다.

글로벌 아이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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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리 하이웨이가 지난 17일 이름을 바꿨다. 알링턴 주변 7㎞ 정도 구간에 한해서지만, 리 장군의 이름 대신 버지니아 최초의 흑인 하원의원 존 랭스턴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알링턴 카운티가 이름 변경 계획을 밝혔을 때부터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리 장군도 훌륭한 사람이다,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100년 가까이 잘 사용해 왔는데 이제 와 바꾸는 것은 세금 낭비다, 여러 반론이 잇따랐다. 실제 도로 이름을 바꾸면 갈아치워야 할 표지판이 82개에 이른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이에 따른 제반 비용을 30만 달러(약 3억 4000만원)로 추산했다.

그런데도 알링턴 카운티가 변경을 결정한 이유는 “우리 지역을 방문하는 이들 중 누구도 불편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자랑스러운 이름이 누군가에겐 괴로운 과거라는 이야기다. 또 다른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이름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며칠 전 한국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한 시민단체가 경남 합천의 ‘일해 공원’ 이름을 바꾸라고 강하게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2004년 ‘새천년 생명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 공원은 200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호 ‘일해’(日海)를 따 ‘일해공원’으로 바뀌었다. 공원 입구에는 전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졌고, ‘전두환 대통령이 출생하신 자랑스러운 고장임을 후세에 영원히 기념하고자 표지석을 세운다’는 설명도 적혔다.

5·18 단체를 중심으로 매년 이름을 바꾸란 요구가 있었지만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군내 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표를 의식해 모른 척하고 있다는 게 시민단체의 지적이다.

알링턴 카운티의 설명대로, 누군가에게 자랑스러울지 모를 이 공원 이름은 분명 누군가에겐 괴로운 과거다. 그리고 다른 훌륭한 사람은 많다. 이는 합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