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당파 싸움으로 3족·9족 멸했다”는 가짜뉴스

중앙일보

입력 2021.07.23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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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사이비 역사’의 선정주의

정조의 독살설을 다룬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1995·왼쪽). 실제 역사와 영화·드라마의 분별이 필요하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정조의 독살설을 다룬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1995·왼쪽). 실제 역사와 영화·드라마의 분별이 필요하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딱딱한 도학자는 편견’이란 제목이 달린 지난달 내 글(6월 25일자)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그렇게 정 많은 조선 사대부들. 당파 싸움엔 3족 9족을 멸하고 형언할 수 없는 고문에다 당파 싸움에 진 상대방 사대부 부인과 딸들을 노비와 성적 노리개로 삼은 것은 참 미스터리외다.”

상대편 아녀자 노예로 삼지 않아
정조 독살설은 사랑방 얘기 수준
“주자 이론 손질하면 죽음”도 오해
역사와 드라마 혼동해서는 곤란

해당 칼럼 내용은, 조선사람들은 인간을 이성(理性)보다 정(情)의 존재로 이해했다, 이성을 강조하기보다 잘 울고 슬퍼하며 제때 화내는 게 중요했다는 거였다. 널리 알려졌지만 실은 잘 모르는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도 이 주제에 대한 철학적 탐구였다고 봤다. 사례로 김수항이 밤에 일어나 죽은 아이를 슬퍼하다 아내가 깰까 해서 벽을 보고 울던 일, 병자호란 뒤 심양에 억류돼 생사를 알 수 없던 상황에서 흡연을 두고 김상헌·최명길·이경여가 주고받은 농 섞인 시를 읽었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신상옥 감독의 ‘이조여인잔혹사’(1969). 실제 역사와 영화·드라마의 분별이 필요하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조선시대 여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신상옥 감독의 ‘이조여인잔혹사’(1969). 실제 역사와 영화·드라마의 분별이 필요하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댓글에 나는 답글을 달았다. “필자 오항녕입니다. ‘당파 싸움에 3족 9족을 멸하고, 고문하고, 상대방 사대부 부인과 딸을 노비와 성적 노리개로 삼은 사례’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사화)을 제외하고, 적어도 퇴율(퇴계와 율곡) 시대 이후 제가 그런 사례를 모릅니다”라고 하고, e-메일도 알려줬다.

역사 전문가도 빠져드는 일반화 함정

댓글은 짧게 의견을 내는 공간이라 충분히 의사가 전달된다고 보기 어렵다. 한데 답글을 단 이유는 단지 칼럼의 논지와 벗어난 댓글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댓글 내용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어투로 보아 점잖은 분인데, 정작 내게 반론으로 제시한 근거는 무척 선정적이었다. 언제 당파 싸움으로 3족, 9족을 멸했지? 고문은 했다. 숙종 기사사화 때 장희빈을 왕비로 앉히려고 숙종은 그에 반대하던 박태보·오두인을 처절하게 고문했고, 경종 때 김일경 등의 무고로 김창집 등 수십 명을 죽이고 귀양 보낸 신임사화가 있었다. 이때 60여 명이 죽임을 당했고 300여 명이 귀양 등 엄벌을 받았다. 그러나 ‘상대방 사대부 부인과 딸을 노비와 성적 노리개’로 삼은 일은 없었다. 나는 이 분의 답변을 기다리면서, 아울러 조선시대를 보는 눈이나 태도에 대해 돌아볼 필요를 느꼈다.

몇 년 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H학자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책이 현실을 재단하던 시절! …조선의 사대부들은 제 손으로 책을 고르지 못했고, 주어진 책은 도무지 버리지 못했다. … 주자(朱子)의 주석에 손을 댔다 하여 사람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야만적 행태가 멀쩡히 자행돼서는 만만 안 되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주자학을 둘러싸고 갈등했던 송시열의 초상

조선시대 주자학을 둘러싸고 갈등했던 송시열의 초상

나는 저자의 이 ‘통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일이 언제, 누구의 일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책 내용으로 추론컨대 호란 이후, 정조(正祖) 이전인 것은 분명하니까, 윤휴(尹鑴)에 대한 서술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근사하리라 생각했다. 조선 성리학에 대해 ‘정통과 이단’의 투쟁이라는 인상을 갖게 했던 이병도나 미우라 쿠니오(三浦國雄)의 논문이 나온 이후, 송시열과 윤휴의 논쟁을 놓고 H교수와 같은 인식에 바탕을 둔 개설서 서술이 많기 때문이다.

마침 H교수가 재직하는 학교로 특강을 가게 된 나는 H교수에게 저런 사료는 어디서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사료를 본 게 아니라, 그동안 사문난적 운운하는 식으로 조선사상사를 주자학-반주자학 구도로 설명하던 논문과 개설서를 참고하여 저렇게 서술한 것이라고 말했다. 내 예상대로였다.

조선시대 주자학을 둘러싸고 갈등했던 윤휴의 초상. [중앙포토]

조선시대 주자학을 둘러싸고 갈등했던 윤휴의 초상. [중앙포토]

한데 윤휴는 주자 주석과 다른 해석을 저술한 탓에 귀양을 가고 사약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윤휴의 『중용신주(中庸新注)』로 인해 송시열이 그를 사문난적이라고 비판한 때는 효종 4년(1653)이었다. 이 일이 있은 뒤에도 효종 9년 송시열은 윤휴를 세자를 가르치는 선생인 자의(諮議)로 추천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숙종 때 윤휴가 우참찬으로 있다가 귀양을 간 것은 다른 이유였다.

예송 논쟁이 사화로 비화하고, 이어 조정에서는 병권을 둘러싸고 김석주 등 외척, 허적 등 권력가들이 갈등했다. 이들은 당시 다시 설치된 체찰부(국방부+안보위) 지휘권을 두고 다투었고, 숙종은 윤휴를 배제했다. 윤휴가 항의하다가 숙종 어머니인 명성왕후를 모욕하는 발언을 했고, 이것이 빌미가 돼 귀양을 갔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는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이미 이에 대한 박사 논문도 나왔다. H교수는 “진즉 알려주지 그랬어!” 하며, 잘 알겠다고 시크하게 대답했다.

얼마 뒤 유명한 K교수에게 전화가 왔는데, 하필 같은 내용을 물었다. 나는 30분 넘게 위의 내용대로 전거와 사료를 설명했다. 사상과 학문의 경직성에서 유래한 사건이 아니라, 왕정의 메커니즘에서 이해해야 할 사건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다 듣고 난 뒤 K교수는 “어쨌든 갈라서서 서로 깐 거는 맞는 거지?” 했다. 어차피 그렇게 이해할 거 왜 물어보지?

주자-반주자, 실학-허학 이분법의 오류

조선시대 형벌·감옥 등을 그린 김윤보(1865~1938)의 『형정도첩』 일부. [중앙포토]

조선시대 형벌·감옥 등을 그린 김윤보(1865~1938)의 『형정도첩』 일부. [중앙포토]

이 두 에피소드의 서로 다른 결과는 내가 부족한 탓이기도 하지만, H교수와 K교수의 학문하는 태도에서 연유하기도 한다. K교수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백날 설명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러니 아직도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을 반주자학이라고 우기고, 주자학-반주자학, 허학-실학의 영양가 없는 이분법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는 점만 지적하고 가자. 조선 역사를 학문이 아니라 센세이셔널리즘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주자의 주석에 손을 댔다 하여 사람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야만적 행태가 자행된 적이 없다.”

오늘은 생산적인 역사 공부를 위해 두 가지만 확인하고 가겠다. 첫째, 우리는 언제나 ‘어떤 사건에 대한 일부분의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를 보여주는 역사상은 없다. 종종 ①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고 시도하거나(전체사, 총체성 또는 요즘 가끔 들리는 빅히스토리. 참고로 빅히스토리 프로젝트는 이미 1960년대 파산된 바 있다), ② 모든 것에 대해 어떤 측면을 알고자 하거나, ③ 몇몇 관심 사실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하려고 한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 김정희 유배지. 추사의 명작 『세한도』가 태어난 곳이다. [중앙포토]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 김정희 유배지. 추사의 명작 『세한도』가 태어난 곳이다. [중앙포토]

안타깝게도 이 세 가지 시도는 어느 것도 실현될 수 없다. ‘한국사’ ‘조선시대사’라는 것이 어떤 시대와 영역까지 포괄하는지는 논란이 있겠으나, 그 통사·개론들은 한국·조선이라는 대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일부를 담아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조선은 이러했다’는 식의 단정은 성립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이 칼럼에서 다루는 것은 ‘조선 문명’이라는 ‘어떤 역사의 어떤 주제나 소재·측면’을 내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어떤 증거를 가지고 말이다.

둘째, 요즘 포털이나 언론 기사에만 클릭수를 늘이기 위한 센세이셔널리즘이 작동하는 게 아니다. 역사 서술이나 인식에서도 선정주의가 작동한다. 그 선정주의는 ‘사이비 역사’에 수렴할수록 기승을 부린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시대 국왕 독살설이다. 누군가 몰래 독을 먹여 암살했다는, 혹은 암살하려고 했다는 전제를 가지고 증거를 찾고 끼워 맞추는 서술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상업주의의 일환, 주목을 끌기 위해 만든 장치다.

한때 『영원한 제국』으로 널리 알려진 정조 독살설의 경우, 경상도 일부 남인 집안에서 전해오는 사랑방 얘기였다고 한다. 기존 연구에서도 정조의 독살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보았지만, 정조가 심환지와 주고받은 수백장의 편지가 발견됨으로써 독살설은 또 기각됐다. 음모와 의심이 극적 효과에는 크게 도움이 된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에선 불가피하게 이용될 수도 있겠다. 혹여, 역사와 드라마를 혼동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러면 독자 여러분이 한마디 해주시기 바란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중세 유럽의 초야권은 허구
유럽 중세 봉건사회를 설명할 때, 근대사회의 합리성에 비해 부도덕하고 저급한 육욕과 야만적 권력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초야권(初夜權)이다. 아직도 초야권을 검색하면 대부분 봉건 영주의 영지 농노에 대한 성적 수탈의 증거로 등장한다. “세계 각지의 미개 민족에서 볼 수 있는 습속이지만, 중세 유럽에서도 영주(領主)가 농민의 결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행사했다고 한다.”(네이버 두산백과)

그러나 이는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허구였음이 밝혀졌다. “유럽 중세에서 그러한 관습이 존재했다는 직접 증거는 없다. 대부분 영주의 초야권이 실제로 행사됐다는 기록이 아니라 가신의 신부 선택 등에 대한 영주의 권리 등 장원(莊園) 지배권을 보여주는 자료인데, 이는 세금 징수 방식으로 이뤄졌다.”(브리태니커 영문판)

경제외적 강제 같은 복합적 현상의 틈새로 선정성이 스며들고, 그것이 역사를 왜곡한다. 선정주의의 끝은 추하거나 타락하거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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