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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영환의 지방시대

“기초선거 정당 공천 없애야 생활 자치 꽃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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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오영환
오영환 기자 중앙일보 지역전문기자

부활 30년 지방의회의 과제

2019년 1월 경북 예천군 주민들이 군 의회 건물 앞에서 의원들이 해외 연수 도중 일으킨 가이드 폭행 사건과 관련해 사과문을 내걸고 사죄의 절을 하고 있다. [뉴스1]

2019년 1월 경북 예천군 주민들이 군 의회 건물 앞에서 의원들이 해외 연수 도중 일으킨 가이드 폭행 사건과 관련해 사과문을 내걸고 사죄의 절을 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9월 8일 오전 11시 경북 상주시 의회 본회의장. 전체 시의원 17명 가운데 10명이 발의한 정재현 시의회 의장(5선·국민의힘) 불신임안이 상정됐다. 시의회 의석 분포는 국민의힘 13명, 더불어민주당(민주당) 3명, 무소속 1명이다. 불신임 발의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주도했다. 지방자치법 55조는 ‘지방의회는 의장이 법령을 위반하거나 정당한 사유 없이 직무를 수행하지 아니하면 불신임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지역 국회의원 좌우 정당 공천제가 #중앙 정치의 지방 계열화 핵심고리 #폐해에 피로 현상…폐지 여론 강해 #시군구 자치는 정치에서 해방돼야

발의 의원 대표가 읽어내려간 불신임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의회 위상과 품위 손상이다. ‘바르지 못한 행동에 따른 시민들의 지탄’ 등을 제시했다. 둘째는 8대(2018~22년) 전·후반기 의장 선출 과정이다. 두 번 모두 국민의힘 당내 경선에서 A 후보가 정해졌는데도 정 의장이 무시하고 출마해 당선됐다고 했다. 정 의장은 전반기엔 국민의힘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후반기엔 복당한 뒤 소속 의원 7명의 권유로 출마했다. 셋째는 허위공문서 작성이다. 임시회 참석자 14명을 17명으로 불려 회의록을 작성했다고 했다. 정 의장은 불신임안 제출 전 “의회 품위 손상 운운은 적반하장이고, 회의록 작성은 잘못돼 바로잡았다”고 밝혀왔다.

불신임안은 찬성 다수로 가결됐다. 무기명 투표가 아닌 거수 표결을 통해서였다. 본회의는 곧바로 A 의원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상주시 의회 회의록을 재구성해본 의장 불신임 건은 지방 정치의 한 민낯이다. 불신임안 주도 세력은 다수당 내부 문제를 시의회 현안으로 둔갑시켰다. 그것도 법률상 의장 불신임 요건과 거리가 먼 사유를 들고나왔다. 의회는 특정 정당의 도구, 감투싸움의 장으로 전락했다.

시의회 의결은 법원이 뒤집었다. 대구지방법원은 불신임 의결 16일 만에 정 의장이 낸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두 달 전에는 불신임 결의 취소 등 본안 소송에서 정 의장 손을 들어주었다. 불신임안 주도 세력은 그 새 의장 업무추진비를 전액 삭감하기도 했다. 정 의장은 “의회에서 의장을 뽑아놓고 두 달 만에 탄핵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기초의회 운영에 정당의 당론이 개입할 수 없다는 점이 법원 판결로 확인됐다”고 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왜 돌아섰나.
“지역 국회의원 마음이 A 의원 쪽에 있었던 것 아니겠냐. 이를 안 소속 의원들이 내년 선거 공천을 받아야 하니 생각이 바뀐 것 같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하고 싶은 제언이 있다면.
“기초의회 선거에서 정당 공천제가 폐지돼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현 중선거구제도 소선거구제로 바꿔야 한다. 중선거구제에선 유력 정당 후보가 1명은 당선되니 그 정당 입장에선 교두보를 확보한다. 따지고 보면 총선 등에서 유력 정당의 하수인을 만들기 위한 장치다. 시의원 연봉(약 3200만원)도 올려야 경쟁력 있는 사람이 들어온다. 예산이 많이 들면 의원 수를 줄이면 된다. 현재대로 가면 지방자치제는 실패한다.”

민주당 소속 민지현 시의원(초선)은 “정당 공천제가 정치 신인에게 기회를 부여하는 장점도 있지만, 주민을 보고 일해야 할 지방의원이 공천권을 가진 사람에게 충성 경쟁을 하는 경향도 있다”며 “의원들이 중앙당 정책에 얽매이면서 불필요한 갈등도 겪는다”고 했다.

중앙당의, 중앙당에 의한, 중앙당을 위한 지방 정치는 상주시 의회만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방 정치는 중앙 정치에 예속돼 있다. 나라 전체는 정치 과잉 병에 걸려 있고, 그나마 행태는 내전적이다. 그 중앙 정치가 기초의회까지 지배한다. 중앙 정치의 지방 정치 계열화의 핵심 고리는 정당 공천제다. 말이 정당 공천이지, 지역 국회의원의 입김이 절대적이다. 지방의원은 국회의원 보좌관과 한가지다. 행사 의전을 맡고, 당원을 동원하고, 선거운동을 도맡는다. 그 대가가 공천이다.

이스타항공 창업주 이상직 의원(전주을·무소속)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은 국회의원과 기초의원 간 갑을(甲乙) 관계를 웅변한다. 민주당 시의원 2명은 지난해 총선 당시 이 의원의 선거 총괄본부장, 상황실장을 맡았다. 이들은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권리 당원이 일반 여론조사에 중복으로 참여하도록 한 혐의로 지난 6월 1심에서 모두 당선 무효형을 받았다. 전주시 의회 관계자는 언론에 “국회의원이 해당 지역구 기초의원의 생사여탈권을 사실상 쥐고 있는 상황에서 ‘선거를 도와달라’는 의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기초의원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지난 6월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를 맞아 대구시 전·현직 시의원·구의원 거의 대다수가 주호영 후보(의원)를 공개 지지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에서 지방은 철저히 중앙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다”며 “정당 공천은 공천이 아니라 국회의원 개인의 사천(私薦)에 불과하고, 공천 과정도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위장 의식에 불과한 경우가 적잖다”고 했다.

오규석 기장군수

오규석 기장군수

오규석 부산시 기장군수는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에 앞장서온 단체장이다. 지난달 14일 낸 입장문에서 “정당 공천제는 악습 중의 악습이고, 적폐 중의 적폐로 반드시 청산돼야 할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날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도 벌였다. 그는 1995~98년 민선 초대 기장군수(당시 신한국당)를 지낸 뒤 탈당했고, 2010년부터 무소속으로 내리 3선을 했다.

왜 정당 공천제를 반대하나.
“초대 군수 때 폐해를 온몸으로 느꼈다. 당 소속으로 3년을 해보니 중앙당의 시녀, 하수인 노릇을 해야 한다. 중앙당의 끝없는 청탁과 압력, 지역 정치권의 인허가를 포함한 압력에 시달렸다. 3년간 이와 싸운 기억밖에 없다. 무소속인 지금은 소신껏 일할 수 있다.”
첫 군수 땐 기초의회 정당 공천제가 없다가 2006년 선거부터 시행됐는데.
“95~98년엔 군의원들이 주민 편에 서서 판단하고 조례를 만들려고 했다. 지금은 의원들이 당리당략에 따라 군정의 발목을 잡는다. 지역 국회의원 입맛에 맞추고, 주민의 이해와 요구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전국 최초로 군내에서 무상급식을 하려 했더니 당의 지시를  받아 브레이크를 걸더라. 지역 국회의원들은 얼마나 좋겠나. 군의원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호각 불면 다 오니까. 군의원들은 공천을 받아야 하니 절박할 수밖에 없다.”
공천제 폐지가 참 지방 자치·분권의 조건이라는 얘기인가.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시대다. 행정도 그에 맞춰 발 빠르게 대응하고 주민에게 즉각 피드백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방자치는 낮잠을 자고 있다. 아니 퇴보하고 있다. 그 중심에 기초선거 정당 공천제가 있다. 기초단체장까지 안되면 기초의원이라도 폐지해야 생활자치가 된다. 중앙 정부라는 거목을 지탱하는 것은 잔디와 풀뿌리다. 이것이 시들고 썩으면 거목도 곪아 터진다.”
한국과 일본 지자체 단체장 의원 정당 소속 비율

한국과 일본 지자체 단체장 의원 정당 소속 비율

기초 선거 정당 공천제 폐지는 한때 정치권에서 무르익었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지난해 말엔 용인시장을 지낸 정찬민 의원(국민의힘)이 그를 골자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여론은 폐지 쪽이 우세하다. 강원일보가 지난 5월 지역 단체장, 광역·기초의원, 시민 등 150여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를 보자. 일반 시민은 기초 단체장·의원 공천에 대해 각각 62.3%와 81%가 폐지를 지지했다. 반면 국회의원은 기초 단체장에 대해 62.5%가 공천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속내를 훤히 내비쳤다. 영남일보와 대구KBS의 1000명 대상 7월 여론조사에서도 정당 공천제에 대한 지지 응답은 13.6%에 불과했다. 기초선거 정당 공천제 폐지에 대해선 반론도 없지 않다. 토호 세력의 발호나 전·현직 단체장의 권력 비대화 등등.

일본 지방 자치의 탈정치화는 시사점을 준다. 지난해 말 기준 광역·기초 단체장의 정당 소속 비율은 각각 2.1%, 1.0%에 불과하다. 선거 때 여야가 연합으로 추천·지지하거나 순수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후보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정당 소속이 77.4%인 광역 의회를 빼고는 거의 정당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는다. 〈표 참조〉

지방 의회가 부활한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그 새 권한도, 전문성도 강화됐다. 하지만 피로 현상이 역력하다. 주민과 부대껴야 할 의회가 주민의 외면을 받고 있다. 위만 쳐다보면 옆과 아래가 보이지 않는 법이다. 기초 단위 정당 공천을 없애 중앙 지배 구조를 주민 직결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시·군·구 자치는 정치에서 해방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