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머리에 청바지 얹어라" …최초 히잡 쓴 모델 분노의 퇴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세계 최초로 히잡을 착용하고 주요 런웨이를 활보한 유명 모델 할리마 아덴이 업계를 떠난 이유를 밝혔다. [아덴 트위터]

세계 최초로 히잡을 착용하고 주요 런웨이를 활보한 유명 모델 할리마 아덴이 업계를 떠난 이유를 밝혔다. [아덴 트위터]

소말리아 국적으로 케냐 난민 캠프에서 태어난 할리마 아덴(24)은 화려한 패션계의 명과 암을 모두 겪은 인물이다. 독실한 무슬림인 그는 패션모델로는 세계 최초로 뉴욕·밀라노 등 주요 런웨이에 히잡(무슬림 여성이 머리 등에 쓰는 천)을 쓰고 워킹을 선보였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말 돌연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최근 BBC와 인터뷰하면서 약 8개월 만에 입을 연 그는 급작스런 은퇴에 대해 “패션 업계가 소수자를 지나치게 착취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인터뷰는 가디언지에도 소개되며 영미권에서 주목 받고 있다.

그는 BBC에 여러 사례를 열거했는데, 패션 화보 촬영할 때마다 히잡 대신 청바지를 머리에 얹는 게 어떠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또 화장과 머리 스타일을 결정할 때 자신의 의견이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도 그에게 좌절감을 느끼게 했던 지점이다. 그는 점점 패션업계가 자신을 이용하고, 나아가 착취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했다. 그는 “촬영팀이 요구한 스타일링 방식은 때로 내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며 “히잡은 촬영 때마다 점점 작아졌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겼던 히잡을 패션계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셈이다.

2017년 막스마라의 첫 중동 에디션 모델로 무대에 섰던 할리마 아덴. AP=연합뉴스

2017년 막스마라의 첫 중동 에디션 모델로 무대에 섰던 할리마 아덴. AP=연합뉴스

아덴은 패션 업계에서 소수자가 받는 대우가 열악하다고도 주장했다. 자신은 인지도가 있기에 그나마 상황이 좀 나았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는 세계적 모델 에이전시인 IMG와 계약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이슬람교 율법에 따라 신체 노출을 조심해야 했기에 자신을 위한 독립적 탈의 공간을 제공해달라는 것이었다. IMG는 지젤 번천, 릴리 콜, 미란다 커 등 세계적인 모델이 소속된 회사다. 그는 BBC에 자신의 요구사항은 잘 지켜졌지만, 함께 무대에 서는 다른 무슬림 모델에겐 언감생심이었다고 말했다. 아덴은 “처음 모델을 시작할 때 나와 비슷한 소녀들에게 많은 기회를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며 “큰 부담과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모델의 다양성 뿐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인식 변화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양성은 캣워크(패션쇼 무대)만의 문제가 아니”라며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헤어스타일리스트 같은 무대 뒤 스탭들에게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할리마 아덴은 젊은이에게 영감을 주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국 유니세프 페이스북]

할리마 아덴은 젊은이에게 영감을 주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국 유니세프 페이스북]

업계를 떠난 아덴은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앞서 2019년 어린 난민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아이 엠 유(I am You)’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덴은 CBS와의 인터뷰에서 “어릴 적 내가 아는 건 캠프에서의 삶 뿐이었다”며 “살아남기 위해 겪어야 했던 모든 과정을 공감하게 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아덴은 1997년 케냐 북서부에 있는 유엔(UN) 카쿠마 난민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94년 소말리아 내전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쳤다. 당시 아버지는 내전으로 실종 상태였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똑똑해 소말리아어와 스와힐리어를 구사했던 아덴은 캠프에서 어른들을 위해 통역을 하기도 했다. 6살 되던 해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어머니와 여성보호소 등을 거쳐 미네소타 주(州)에 정착했다.

어린 시절의 할리마 아덴. 그는 케냐 난민 수용소에서 자라 6세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덴 인스타그램]

어린 시절의 할리마 아덴. 그는 케냐 난민 수용소에서 자라 6세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덴 인스타그램]

19세가 되던 해 아덴은 미스 USA 미인대회에 히잡과 부르키니(이슬람 여성 의복 ‘부르카’와 ‘비키니’의 합성어)를 착용하고 출전했다. 이후 프랑스 패션계의 전설로 불리는 카린 로이펠트의 눈에 들어 IMG와 계약했고, 이후 ‘보그’ 등 세계적인 패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한 최초의 히잡 착용 모델이 됐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