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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앵무새처럼 대본 읽어서는 ‘마음의 풍경’ 못 바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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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좋은 정치 연설이란 무엇인가

김영민의 생각의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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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대선 출마 선언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정치 연설의 시즌이 온 것이다. 정치 연설은 정책 설명이나 논문 발표가 아니다. 자기 정책의 필요, 비용, 기대효과 등을 상세히 논할 자리는 따로 있다. 정치 연설은 특정한 말하기 방식을 통해 자기 매력을 발산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사람들로 하여금 전과는 다른 심정을 갖게 만드는 것이 퍼포먼스의 목적이다.

정치 연설은 일종의 퍼포먼스 #추상적 비전을 현안과 연결짓고 #현장 흐름따라 사전 계획 넘어서야 #정답 아닌, 좋은 반응 보여주는 것

몇 년 전, 가수 나훈아는 각종 괴소문에 시달렸다. 공연을 취소하고 돈을 물어주었다, 기획사가 망했다, 남의 부인을 탐했다, 심지어 유명 여배우와 염문을 뿌리다가 일본 야쿠자에 의해 몸의 ‘중요 부위’가 도려내졌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참다못한 나훈아는 2008년 1월 25일 서울 그랜드힐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백수의 왕, 사자와도 같은 외모를 하고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각종 소문은 아무 근거가 없다고 일갈한 뒤, 갑자기 탁자 위로 올라가서 사자후를 토해냈다. “밑에가 잘렸다고 한다. … 지금부터 이 단상에 올라가서 바지를 벗고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 지금 여러분 중에 대표를 얘기해달라. 5분간 보여드리겠다. 아니면 믿겠습니까?” 그러고는 실제로 탁자 위로 올라가 혁대를 풀고 바지 지퍼를 약간 내렸다. 꺄악! 기자회견장에 놀란 여성 청중의 외마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효과적인 연설 중 하나였다. 이 연설, 혹은 퍼포먼스를 통해 가수 나훈아를 둘러싼 괴소문은 실로 잠잠해졌다. 나훈아가 실제로 자신의 벗은 하반신을 보여주었던가? 그래서 자기 아랫도리의 무사함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던가? 그렇지 않다. 그는 바지 지퍼를 약간 내린 채 탁자 위에 당당히 서서 포효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풍경이 바뀌었다. 괴소문은 사라졌다.

어떤 사안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연극적 상황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자 한다는 점에서 연설은 제의적이고 주술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한 정치 연설의 자리에서만큼은 그 정치인이 얼마나 유식한지, 혹은 얼마나 이성적인지는 부차적이다. 연단에 오른 정치인이 복잡한 논증을 일삼는다면 사람들은 졸기 시작할 것이다.

정치 연설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일단 무대 선정을 잘해야 한다.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고 김대중 대통령이 흥사단을 첫 연설 장소로 선택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특정한 맥락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싶어한 것이다. 잔 다르크의 고해 신부로 유명한 중세 유럽의 순회 설교자 리샤르(Richard) 수사는 해골이 가득 비치된 아치형 통로에서 설교하기를 즐겼다. 그 해골 덕분에 청중들은 지상에의 삶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한층 더 생생히 느꼈으리라.

퍼포먼스라는 점을 감안하면, 외모도 무시할 수 없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했던 때를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노무현이 날 찾아와서 ‘도와주십시오’ 했을 때 ‘저렇게 생긴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처음엔 그리 생각했다(웃음).” 그렇다고 해서 정치인이 꼭 잘생겨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만인의 관음(觀淫) 대상이 될 정도로 잘생긴 사람은 정치같이 고된 일은 안 할 가능성이 크다. 정치인은 잘 생기기보다는 상상력을 자극하도록 생겨야 한다. 보는 사람을 튕겨내는 얼굴이 아니라, 저 얼굴 속에서 헤엄치고 싶다, 온천을 하고 싶다와 같은 마음이 들어야 한다.

정책 대결을 해야 할 신성한 선거에서 무슨 외모 타령이냐고? 제가 남보다 잘 생겼으니 저를 찍어주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외모가 얼마나 집권에 유용한지를 말하는 역사적 기록들은 적지 않다. 『삼국사기』의 정치인 묘사는 대개 외모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청나라에 간 조선 사신들은 강희제의 용모가 황제직을 잘 수행할만한 면이 있는지 유심히 살폈다. 현실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얼굴을 잘 씻기라도 해야 한다.

잘 씻은 다음에는,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비유를 써서, 어떤 몸짓과 더불어 말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 과정을 통해 자기 통제력 수준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생업에 바쁘고, 인생은 짧다. 지루한 복색을 한 지루한 정치인이 하는 지루한 연설을 끝까지 들어줄 사람은 많지 않다. 연설 과정에서 자신이 대통령직에 필요한 체력, 에너지,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면 금상첨화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농구대에 점프슛을 하거나, 문을 박차고 나가거나, 연단을 가볍게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촐싹대거나 흥분 상태에 있다는 느낌을 주라는 말은 아니다. 최고의 의사 결정을 내릴 사람에게 침착함은 필수적인 덕목이다. 정치인에게 공감 능력은 필수적이지만, 공감 능력을 과시한답시고 감정의 물난리가 나서는 안된다. 로마 시대의 분수처럼, 다루기 어려운 수자원을 능숙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연설의 내용도 물론 중요하다. 보다 나은 정치를 약속하는 마당에 기존 정치를 마냥 찬양할 수는 없다. 아쉬운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리더십을 발휘하고자 하는 정치공동체를 저주해서는 안된다. 이 사회를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자긍심에도 호소할 줄 알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그 유명한 추도식 연설에서 “저는 이 나라가 어떤 원칙들로 인해 현 상태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어떤 체제와 삶의 방식으로 인해 위대해졌는지 우선 밝히겠다”고 말한 바 있다.

연설문에는 장기적인 비전이 담겨야 한다. 시대의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의식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목전의 청중에게 호소하면서도,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 다음 세대가 읽어도 좋을 만한 명료하고도 유려한 연설문을 남겨야 한다. 좋은 연설문은 세대를 뛰어넘어 시민 교육의 바탕이 될 수 있다. 비전을 제시하는 연설문이라면 당대의 청중만 고려해서는 안된다.

비전을 제시한다고 해서 추상적인 이야기만 일삼으라는 것은 아니다. 추상적인 비전을 사회 현안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이즈음 정치인이 ‘능력’과 ‘공정’에 대해서 의견을 표시하는 것은 현안에 눈감고 있지 않다는 증표다. 페리클레스는 추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적 분쟁에 관한 한 모두가 법률적으로 평등합니다. 공적인 일에 관한 한 … 탁월함에 의해서 자리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도시에 뭔가 좋은 일을 할 능력이 있다면, 가난에 따른 신분의 미미함으로 인해 제약받는 일도 없습니다.”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을 구분하고, 탁월함이 요구되는 영역을 명시한 뒤, 그 탁월함은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발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불과 몇 문장으로 표현해냈다.

정말 좋은 퍼포먼스를 하기 바란다면, 연설 대본을 미리 써 놓고 앵무새처럼 읽어서는 안된다. 아무 연설 대본 없이 즉흥적으로 연설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좋은 연설 대본을 만들되, 현장의 흐름에 따라 그 대본의 자구(字句)를 벗어날 필요가 느껴지면 과감히 벗어날 수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급 예술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사전 계획대로만 되는 작품은 최상의 작품이 아니라고. 글을 쓰는 일이든, 퍼포먼스를 펼치는 일이든, 사전 계획을 창의적으로 넘어설 때 진짜 좋은 작품이 된다.

그러한 임의성과 창발성은 프롬프터를 보고 읽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연설에 이어지는 질의응답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까다로운 질문이 제기될까 봐 사전에 질문과 답의 합을 맞추어 놓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정치인이라면 질의응답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질의응답 시간이야말로 자신의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이다. 청중이 질문을 던졌을 때, 정답을 말하려고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 나오는 질문들은 정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그 정치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던지는 미끼에 가깝다. 유능한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매력을 발휘할 기회로 그 미끼를 활용할 것이다. 유머를 섞거나 질문을 재창조하기도 할 것이다. 관건은 꼭 정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