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미술관, 이제야 이중섭 '소' 두 마리 품게 된 사연

중앙일보

입력 2021.07.21 15:17

업데이트 2021.07.21 17:42

"창피하지만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에 반드시 있어야 할 작품들이 사실은 없었습니다. 지난 4월에 1488점의 기증작을 받으며 미술관은 말그대로 소원성취를 한 것이죠."

이건희 기증전이 드러낸 현실
'국민화가' 대표작 소장 빈곤

'이건희 기증전' 개막에 앞서 20일 기자들과 만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들의 말이었다. 이들은 "이중섭의 소 한 마리 없었던 미술관에 이번 기증으로 두 마리가 한 번에 들어왔다. 이것은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삼성가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고(故) 이건희(1942~2020) 회장의 주요 문화재와 미술품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늘(21일)부터 관람객을 만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선 국보·보물 28건을 포함한 명품 77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선 한국 근대미술 거장 34명의 대표작 58점을 소개한다.

특히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내년 3월13일까지)이란 제목을 내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엔 김환기·이중섭·박수근·장욱진·이응노·천경자 등 한국 미술사 거장들의 작품이 줄줄이 걸려 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국립현대미술관의 현실도 드러났다. 국가대표 미술관인 그곳에 지금까지 이중섭의 '소' 그림 한 점 없었고, 김환기의 점화 역시 단 한 점도 소장돼 있지 않았다는 것.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국민작가'들의 대표작을 이번에 비로소 소장하게 됐다. 이건희 기증전이 드러낸 현실을 다시 짚어본다.

①기증받기 전엔 이중섭 '소' 한 마리 없었다

 이중섭 (1916-1956), 황소, 1950 년대, 종이에 유채, 26.5x36.7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1916-1956), 황소, 1950 년대, 종이에 유채, 26.5x36.7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1916-1956), 흰 소, 950 년대, 종이에 유채, 30.5x41.5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1916-1956), 흰 소, 950 년대, 종이에 유채, 30.5x41.5c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전시엔 이중섭(1916~1956)의 작품이 총 네 점 출품됐다. 그중 소 그림이 '황소'(1950년대)와 '흰 소'(1950년대) 등 두 점. 널리 알려져 있듯이 '황소'는 이중섭이 일본 유학 시절부터 즐겨 그리던 소재 중 하나.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에게 소는 인내와 끈기를 뜻하는 민족적 상징물이었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이중섭의 소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중섭의 심리 상태와 처지는 소를 통해 표현되고 했다"면서 "힘차면서도 어딘지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는 게 이중섭 황소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이중섭의 소 그림 한 점 없었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소' 그림을 소장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국민화가' 이중섭의 대표 작품이지만, 그림 한 점 사들이기엔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다.

예컨대 2018년 3월 서울옥션에서 이중섭의 소 그림이 47억 원에 낙찰됐다. 비싸기도 하지만 경매에 자주 나오지도 않는다. 당시 소 그림은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35억6천만 원에 낙찰된 이래 경매에 처음 나온 것이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한 해 동안 작품 구입에 쓸 수 있는 예산은 48억원. 한 해 예산을 다 써야 이중섭 소 그림 한 점을 겨우 살 수 있다는 얘기다. 학예사들이 "이번 기증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비어있던 큰 구멍들이 비로소 메꿔지게 됐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②김환기의 점화도 단 한 점 없었다

김환기,산울림 19-II-73#307, 1973, 캔버스에 유채,264x213cm. 환기재단·[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김환기,산울림 19-II-73#307, 1973, 캔버스에 유채,264x213cm. 환기재단·[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을 압도하는 그림이 적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김환기(1913~1974)의 대형 회화 3점의 위용이 남다르다. '여인들과 항아리' '산울림 19-II-73#307' (이하 산울림), '3-X-69#120' 등은 각기 다른 특색으로 끊임없이 실험을 계속하며 변화를 모색한 김환기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그중 '산울림'(1973)은 김환기의 뉴욕 시기 점화 양식의 완성 단계를 보여주는 작품. 김환기는 1964년 뉴욕에 정착한 후 점, 선, 면만으로 이뤄진 추상 실험을 이어왔는데, 1970년대부터 다양한 형태의 점화를 시도했다. 화면 전체에 물감으로 점을 찍고 반복하며 리듬을 만들어내며 무한히 확산되어가는 공간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 '산울림'은 김환기의 점화 그림이 한창 무르익은 시절의 그림이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들은 "이번 기증이 이뤄지기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엔 김환기의 점화 역시 단 한 점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산울림'이 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첫 김환기 점화라는 얘기다.

한편 2019년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선 김환기의 1971년작 푸른색 점화 ‘우주, 5-IV-71 #200’이 8800만 홍콩달러(약 132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국가 미술관 예산으로는 도저히 사들일 수 없는 가격대다.

박미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들은 '국가 대표 미술관에 이중섭의 '소'도 없고, 김환기의 점화도 없다'고 말하며 이를 항상 안타까워해왔다"면서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미술관 소장품의 심각한 갈증이 일부 해소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해온 이중섭 작품은 11점. 그러나 이번 기증품 중 이중섭 작품은 총 104점(회화 19점, 엽서화 43점, 은지화 27점 등)에 달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에 귀한 이중섭 작품이 대거 들어오며 기증품만으로도 이중섭 개인전을 열 수 있을 정도로 소장품이 풍부해졌다"며 "앞으로 조사·연구를 통해 작품을 차례로 소개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③박수근 대작도 한 점 겨우 있었다 

 박수근 (1914-1965), 유동, 1954,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 (1914-1965), 유동, 1954,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전시에선 박수근의 작품이 '절구질하는 여인'(1954)'유동'(1963)'농악'(1960년대) 등 총 3점이 전시되고 있다. 3점 모두 대형 작품들이다.

박수근은 A4 종이 사이즈의 소형 작품을 많이 해온 작가로 유명하다. 작품의 80%가 손바닥 2개 크기의 소품인 것. 그래서 박수근의 대작은 매우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 전시작 3점 모두 이례적으로 큰 사이즈다. 고 이건희 회장은 박수근 작품 가운데 대작은 거의 다 소장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 대작들이 미술관으로 온 것. '절구질하는 여인'은 6·25전쟁 직후 야심 차게 그려 국전에 출품해 입선한 작품. '농악'은 박수근이 그린 농악 그림 7점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작이다.

지금까지 미술관이 소장해온 박수근 작품은 총 11점. 이중 이번에 전시된 3점과 같은 크기의 대작은 단 한 점뿐이었다. 이번에 '이건희 컬렉션' 중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박수근 작품은 회화 18점, 드로잉 15점 등 총 33점에 달한다. 한편 박수근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는 소품 유화 4점과 드로잉 14점이 기증됐다. 윤범모 관장은 "박수근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오는 11월 덕수궁관에서 열릴 '박수근 회고전'에서 많이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국가 자원"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했다. 소장품 0점으로 출발한 미술관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미술관은 이제 소장품 1만점 시대를 맞았다. 윤범모 관장은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이번 기증품 1488점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의 질과 양을 비약적으로 보강시켰다"면서 "이게 모두 국가의 자원이다. 이번 기증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가치가 정말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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