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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가지 못한 올림픽 길, '바람의 손자'가 뚫는다

중앙일보

입력

도쿄올림픽 야구대표팀 이정후 [연합뉴스]

도쿄올림픽 야구대표팀 이정후 [연합뉴스]

'바람의 아들' 이종범(51·현 LG 2군 타격코치)은 한국 프로야구가 낳은 불세출의 스타다.

데뷔 2년 차이던 1994년 정규시즌 MVP(최우수선수)를 수상했다. 2011년 은퇴할 때까지 KBO리그 타격왕 1회, 도루왕 4회, 득점왕 5회 등 굵직굵직한 이력을 남겼다. 1994년 달성한 도루 84개는 아직도 깨지지 않는 단일 시즌 기록. 선수 생활 내내 남부럽지 않은 커리어를 쌓았지만 유독 인연이 없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올림픽이다.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한국 야구 역사상 첫 번째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일본 프로야구(NPB)에서 뛰고 있어 출전이 불발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젊은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대표팀 주장으로 4강 신화를 이뤄냈지만, 올림픽은 출전 경험이 아예 없다.

아버지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건 아들, '바람의 손자'로 불리는 이정후(23·키움)다. 이정후는 지난달 16일 발표된 도쿄올림픽 야구대표팀 최종 엔트리(24명)에 이름을 올렸다. 2017년 1군에 데뷔한 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2019년 프리미어12에 연이어 출전했다. 이어 올림픽 대표까지 차출돼 아버지가 가지 못한 길을 걷게 됐다. 도쿄올림픽에선 박건우(두산), 김현수(LG)와 함께 주전 외야수가 유력한 상황. 강백호(KT)와 함께 김경문 대표팀 감독이 기대를 거는 주축 타자다.

아버지와 달리 타이밍이 잘 맞았다. 올림픽에서 야구 종목은 2008년 대회를 끝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 지위를 잃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 부활했고 이정후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올림픽은 어렸을 때부터 나가고 싶었다. 앞선 선배들이 출전한 많은 국제대회를 보면서 자랐고 언젠가 그 자리에서 경기를 뛰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올림픽에서는 야구 종목이 없어졌다가 채택됐는데 다시 없어질 수 있어서 이번 대회가 더 의미 있다"고 말했다.

한국 대표팀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우승한 '디펜딩 챔피언'이다. 이번 대회에 쏠리는 관심도 많다. 야구는 총 6개 국가가 참여해 메달을 다툰다. 숙적 일본과의 맞대결 결과에 따라 메달 색이 달라질 전망. 이정후는 "올림픽은 단기전이다. 아무리 일본의 전력이 좋다고 해도 자국에서 열리고 성적에 대한 압박감도 있기 때문에 부담을 가지는 건 상대 팀일 것 같다"며 "코로나19 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치러지는 한·일전이다. 국민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드릴 수 있도록 죽기 살기로 하겠다"고 말했다.

프로야구는 현재 위기다. 시즌 중 원정숙소를 이탈해 술판을 벌이는 등 선수들의 일탈이 연이어 확인돼 야구계 안팎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이정후는 "야구 인기가 점점 시들해지는 현 상황에서 이번 올림픽이 야구의 인기를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있다. 금메달을 목표로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당차게 말했다.

'바람의 아들'이 가지 못했던 올림픽 길. 그의 활약을 지켜보며 성장한 '바람의 손자'가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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