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깨달은 진짜 나” 입소문에 2만명 찾은 이 전시관

중앙일보

입력 2021.07.21 05:00

업데이트 2021.07.21 15:15

사람과 사람이 다가서기 어렵게 됐다.  

내가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특정 사람, 국민, 인종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누군가의 손을 잡기는 꺼려지지만 때로 사람의 온기가 너무나 그립다.

국경을 가리지 않고 퍼진 감염증 속에서 사람들은 깨닫는다. 

세상은 나 혼자만 잘 살아갈 순 없다는 것을. 이 위기도 결국 함께할 때만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제주 서부 중산간 지대의 '새별오름' 풍경. 제주엔 성산 일출봉 등 약 360개의 소형화산체(기생화산)인 오름이 있다. 이소아 기자

제주 서부 중산간 지대의 '새별오름' 풍경. 제주엔 성산 일출봉 등 약 360개의 소형화산체(기생화산)인 오름이 있다. 이소아 기자

제주의 안쪽은 조용하다. 해안 쪽에 자리 잡은 도시와 공항, 해수욕장들은 사람들로 붐비지만, 섬 중앙의 한라산 주위로 펼쳐진 중산간(中山間) 지역은 인위적인 발길들이 잦지 않다. 대신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솟은 오름들, 변화무쌍한 구름과 흐린 하늘 사이로 선물처럼 비추는 한 줄기 햇살이 자연의 오묘함을 뽐낸다.

포도뮤지엄은 그런 중산간 지역에 세워진 2층짜리 문화공간이다. 이름은 근처의 포도호텔에서 따왔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준이 설계한 이 호텔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생김새가 포도송이 같다고 해서 재미있는 이름이 붙여졌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포도뮤지엄 전경. 이소아 기자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포도뮤지엄 전경. 이소아 기자

자연 속에 덩그러니 서 있는 건물이 적막해 보이기도 한다. 코로나19 상황이 엄중해 입장 인원은 시간당 80명으로 제한하고 방역의 고삐를 죄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 4월24일 문을 연 이래 석 달도 안 돼 2만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다. 해외여행길이 막혔다지만 제주의 외딴 전시장을 평일에 200~300명씩 찾았다니 의외다. 제주 내에서도 조용한 화젯거리다.

전시의 주제는 결코 밝고 가볍지 않다. 첫 번째 전시는 우리가 지닌 편견과 오해, 누군가에 대한 험담과 혐오가 얼마나 큰 상처와 비극을 낳는지 일깨우는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이다. 중세의 마녀사냥부터 죄 없는 양민에 대한 탄압, 유대인 대학살, 현대의 각종 자극적인 정보와 선동까지…편견과 혐오가 시작되고 퍼져나가 파괴적인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살아오는 동안 나 자신도 피해자이자 곧 가해자였을지 모른다.

끝없이 늘어선 새빨간 앵무새는 아무 생각 없이 남의 말을 따라 하며 소문을 옮기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소아 기자

끝없이 늘어선 새빨간 앵무새는 아무 생각 없이 남의 말을 따라 하며 소문을 옮기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소아 기자

편견과 혐오는 마치 바이러스처럼 국경을 넘나든다. 이 전시도 국적을 넘어 한·중·일 작가 8명이 참여했다. 작품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양쪽에 늘어선 새빨간 앵무새들은 끝없이 소문을 옮기는 사람들은 상징한다. 벽에 난 구멍을 들여다보면 평소 별생각 없이 나누는 뒷담화부터 권력자들이 사용했던 선동의 문구까지 역사상 존재했던 글귀들이 보인다.

'소문의 벽'에 난 구멍을 들여다보면 14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실제 사람들이 했던 다양한 소문과 뒷담화, 추측과 선입견이 담긴 글귀가 보인다. 구멍에 볼록렌즈가 있어 글자의 크기를 과장하거나 왜곡시킨다. 이소아 기자

'소문의 벽'에 난 구멍을 들여다보면 14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실제 사람들이 했던 다양한 소문과 뒷담화, 추측과 선입견이 담긴 글귀가 보인다. 구멍에 볼록렌즈가 있어 글자의 크기를 과장하거나 왜곡시킨다. 이소아 기자

희한하게도 대중은 험담과 혐오에 쉽게 휘둘린다. 벽에 다가서면 내 그림자의 크기만큼 여러 국가에서 쓰였던 혐오 발언들이 나타나는데, 다른 사람이 내 옆에 서면 그림자 면적이 넓어지면서 더 많은 발언이 나타난다.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의 편견과 혐오는 커져간다.

벽에 다가서면 내 그림자가 커지고 여기에 독일·일본·중국·미국 등 여러 국가의 혐오 발언들이 나타나 채워진다. 내가 속한 집단의 피해에 과도하게 공감할수록 다른 집단에 대한 배척과 혐오 감정도 커진다. 사진 포도뮤지엄

벽에 다가서면 내 그림자가 커지고 여기에 독일·일본·중국·미국 등 여러 국가의 혐오 발언들이 나타나 채워진다. 내가 속한 집단의 피해에 과도하게 공감할수록 다른 집단에 대한 배척과 혐오 감정도 커진다. 사진 포도뮤지엄

최수진 작가의 '벌레 먹은 숲' (왼쪽)과 권용주 작가의 '익명'(오른쪽). 작품 '익명'은 키가 140cm 정도 되는 열 살 남짓 되는 아이의 모습으로, 파이프와 전선 등 도심 폐기물 더미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얼굴이 가려진 이 아이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소아 기자

최수진 작가의 '벌레 먹은 숲' (왼쪽)과 권용주 작가의 '익명'(오른쪽). 작품 '익명'은 키가 140cm 정도 되는 열 살 남짓 되는 아이의 모습으로, 파이프와 전선 등 도심 폐기물 더미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얼굴이 가려진 이 아이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소아 기자

층수는 낮지만 전시장 내부는 높고 넓다. 이번 전시에도 큼직한 조형물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바닥부터 천장까지 자유롭게 설치할 정도로 공간이 여유롭다. 나무와 과일이 가득한 숲속을 연출한 공간은 자세히 보면 벌레에 갉아 먹혀 떨어져 나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한국 사회에도 특정 직업이나 성별, 연령대를 비하하며 ‘○○충’ 이라고 부르는 말이 퍼져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벌레라고 부르면 나는 오롯이 훌륭한 사람인 걸까.

제주에 사는 김태희(45)씨는 중3과 고3인 두 아들에게 전시를 보여주기 위해 두 번째로 뮤지엄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 탓에 거리를 두고 서로를 피하며 살다보니 더욱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워졌다”며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해 주고 싶어 다시 왔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 전엔 제주에서 관광 안내 일을 했다. 여행객이 사라진 지금 물리적·심적 단절을 누구보다 절감한다”고 안타까워했다.

한 관람객이 작품 '기업의 서랍' 에 붙여진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다. 장샤오강은 중국인과 중국사회의 자화상을 표현한 작가다. 이소아 기자

한 관람객이 작품 '기업의 서랍' 에 붙여진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다. 장샤오강은 중국인과 중국사회의 자화상을 표현한 작가다. 이소아 기자

많은 중국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장샤오강의 작품도 있다. 거대한 서랍장 안에는 제2차 세계대전부터 1960년대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가족사진, 편지 등 기억의 조각들이 담겨있다. 이들은 전쟁·내전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져갔다. 비록 전쟁처럼 큰 사건은 아니더라도 요즘처럼 사람과 사물이 인터넷으로 빼곡히 연결된 시대에 작은 험담 하나가 누군가의 소중한 일상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2층 전시장 입구의 독일 작가 케테 콜비츠 사진. 세계대전에서 아들과 손자를 잃으면서, 모든 어머니들을 대변해 예술활동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다. 이소아 기자

2층 전시장 입구의 독일 작가 케테 콜비츠 사진. 세계대전에서 아들과 손자를 잃으면서, 모든 어머니들을 대변해 예술활동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다. 이소아 기자

“아가, 봄이 왔다” (1919년 2월 6일 일기 중)
2층 전시는 단번에 우리를 100년 전으로 데려간다.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독일의 여성 판화가 케테 콜비츠(1867~1945)의 작품들이 차분한 조명 아래 걸려있다. 세계대전에 아들과 손자를 잃은 비극적인 어머니로서 한국에도 꽤 알려진 작가다. 전시를 보러 일부러 멀리서 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부모'. 케테 콜비츠. 이소아 기자

'부모'. 케테 콜비츠. 이소아 기자

작품마다 자식을 향한 슬픔과 모성애가 조용히 눈물처럼 흐른다. 두 아이를 온 힘을 다해 껴안고 있는 여인의 조각, 앙상하고 거친 손으로 얼굴을 감싼 아버지와 그 팔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판화 앞에선 가슴이 먹먹하다. 두 가지 전시는 언뜻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콜비츠가 겪었던 삶의 비극은 전쟁이라는 혐오와 왜곡된 적대감의 역사적 증거다.
친구와 전시를 둘러본 송은영(27)씨는 “미술을 전공하는데 작품과 이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하나로 통하는 수준 높은 전시”라며 “주제가 무거워 살짝 당황했지만 둘러볼수록 묵직한 울림이 있고 나를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여인과 두 아이'. 케테 콜비츠. 이소아 기자

'여인과 두 아이'. 케테 콜비츠. 이소아 기자

내년 3월7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를 두고 고민도 있었다. 가뜩이나 지친 코로나 시국에 무거운 메시지를 던져 외면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하지만 ‘국민의 의식 수준이 기획 취지를 이해할 만큼 높다’는 판단에 밀어붙였다고 한다. SK의 공익법인인 티앤씨재단이 주최하고 김희영 재단 대표가 전시 기획을 총괄했다.

최단비 포도뮤지엄 학예연구팀장은 “포도뮤지엄이 바라는 건 사람들에게 한 번쯤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며 “순수미술도 좋고 오락도 좋지만 앞으로 공감과 화해, 보편적 인류애 같은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공간으로 채워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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