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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김정은은 북한을 모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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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 경제학부 교수

북한은 최근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자발적으로 검토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통계가 거의 나오지 않는 보통 북한 발표와는 달리 이 보고서엔 주요 경제 통계가 일부나마 담겨 있다. 2015∼19년의 국민소득과 2014∼20년의 곡물 생산량이 그 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5∼19년 동안 국민총생산과 일인당 국민소득은 각각 연평균 5.1%, 4.6% 증가했다. 같은 기간 한국 성장률의 2배쯤 되는 높은 성장률이다. 특히 제재가 실행되던 기간인 2017∼19년에도 경제는 해마다 3.7∼4.7% 성장했다고 주장한다. 체제선전을 위해 보고서 수치를 부풀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 통계가 정확하다고 정말 믿는 것일까.

북한이 발표한 국민소득 통계는 #깨어진 거울처럼 현실을 왜곡해 #김정은, 북한을 모른 채 정책 결정 #경제를 절벽으로 내몰고 있어

정황을 보면 후자에 가까워 보인다. 그 근거로 북한 사회과학원의 리기성 박사가 비공개 세미나에서 발표한 2014년 국민소득 추정치와 이번 보고서에 공개된 2015년 국민소득 수치가 일맥상통함을 들 수 있다. 또 그가 2018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2017년의 성장률이 이 보고서가 시사한 수치와 같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북한 정부가 의도적으로 부풀린 성장률을 담았다기보다 기존의 공식통계를 그대로 인용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공식통계이므로 김정은도 경제가 견고히 성장하고 있다고 믿었을 법하다. 즉 8차 당대회에서 그는 애초에 계획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음을 인정했을 뿐이지 경제가 위기에 처해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북한의 통계는 틀렸다. 내적 일관성과 외적 타당성이 없다. 보고서는 2018년 곡물 생산량이 약 8% 감소했다고 밝히지만 같은 해 국민소득은 오히려 4.3%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산업, 즉 광업, 제조업, 서비스업의 생산이 급증했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 그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의 무역 상대국이 보고하기 때문에 정확도가 높은 무역 통계에 따르면 2018년 북한 수출은 전년 대비 86%나 감소했다. 특히 주력 품목이었던 광물 수출이 막혀 광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 원부자재와 자본재 수입이 감소해 제조업 생산도 줄었다. 주민의 시장 활동이 위축돼 서비스업도 불황에 빠졌다. 그런데 어떻게 경제가 4.3% 성장할 수 있나.

보고서는 2018년 일인당 국민소득이 1262달러라고 밝힌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1279달러인 미얀마와 비슷한 수준이란 뜻이다. 그러나 미얀마는 외국인직접투자가 국내로 유입되고 있었던 반면 북한은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였다. 당연히 미얀마의 소득이 더 높을 것이다. 1262달러라는 수치도 흥미롭다. 한국은행이 남한 원화로 추정한 2018년 북한의 일인당 국민소득을 남한 원화의 대미환율을 적용해 달러로 환산하면 1280달러다. 즉 북한이 발표한 달러 표시 일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은행이 추정한 남한 원화 표시 북한 소득에 남한 원화의 대미환율을 적용한 값과 거의 같다. 그러나 북한이 한국은행을 베꼈다면 잘못 베낀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북한 소득을 달러로 전환하지 말라고 한국은행이 경계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환율은 자국의 경제발전 정도를 반영하므로 남한의 대미환율을 북한에 적용하면 북한 소득을 과대평가한다는 의미다.

북한 통계는 깨어진 거울이다. 경제 현실을 제대로 비추지 못한다. 사회주의가 원래 그렇다. 소련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928년부터 약 70년 동안 소련경제는 연평균 9% 성장했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붕괴할 수 있나. 중앙계획경제에선 기업에 목표생산량을 할당하고 이 달성 여부에 따라 엄격한 상벌을 가한다. 따라서 기업은 다양한 기법을 동원해 실적을 부풀린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거품을 제거하고 추정한 소련 성장률은 공식통계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통계 수준이 낮고 관료의 부패가 극심한 북한은 소련보다 통계의 왜곡이 훨씬 심할 것이다. 2017∼19년 동안 북한은 국민소득이 13% 늘어났다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은행은 7% 감소했다고 추정한다. 북한의 공식통계는 검은색을 흰색이라 부르고 있다.

깨어진 거울이 사물을 왜곡시키듯이 엉터리 통계는 정책을 망친다. 제재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성장한다고 믿으면 김정은은 비핵화 압박에 어떻게 대응하려 할까. 지금처럼 핵을 계속 개발하며 버티려 할 것이다. 코로나 감염병을 막기 위해 무역을 틀어막고 시장을 통제해도 경제가 돌아간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경제를 절벽으로, 주민을 절망으로 내모는 시도다. 북한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다.

북한은 21세기의 생존 방정식을 찾기 위해 정확한 통계부터 갖추어야 한다. 남북 협력이 가능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사업은 제대로 된 북한 통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관광이나 철도 연결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긴급하다. 김정일은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고 했다. 지금 김정은의 눈은 세계를 향하는가, 아니면 핵을 쥐고 경제를 틀어막은 채 자신과 북한을 동굴에 가두고 있는가. 통계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그는 북한을 통치하지만 정작 북한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