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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세기의 축제’를 이웃나라들이 반가워할 수 없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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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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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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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중공)이 지난 1일 창당 100년을 맞아 성대한 축하 행사를 열었다. 이날은 중국공산당에는 세기의 경축일이다. 미국 민주당(1828년)·공화당(1854년), 영국 보수당(창당 1834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1847년), 인도 국민회의(1885년),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188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프리카국민회의(1912년)·국민당(1914년), 대만 중국국민당(1919년)에 이어 100년 정당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중공 창당 23일인데 기념일은 1일 #대약진운동·문혁 오류반성 없이 #경제성과·중화민족주의만 강조 #지역평화 안정, 주변국 압박 지적도

중공은 국민당과의 두 차례에 걸친 국·공 합작과 옌안(延安) 대장정, 항일전쟁, 국공내전 등을 거쳐 1949년 베이징을 수도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그 뒤 대약진 운동(1958~60년)과 문화대혁명(1966~76년) 등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개혁·개방을 추진해 중국을 경제 대국으로 키웠다.

중국은 명목 금액 기준 국제통화기금(IMF) 2021년 국내총생산(GDP) 예상치가 16조6400억 달러로, 미국(22조6752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일본(5조3781억 달러)·독일(4조3192억 달러)·영국(3조1246억 달러)·인도(3조497억 달러)를 합친 수준이다. 2020년 수출 2조5900억 달러에 수입 2조600억 달러의 무역 대국으로 국제적 영향력도 크다. 인구 14억4400만 명의 중국은 2021년 1인당 GDP 예상치가 1만1819달러로 세계 평균을 넘었다.

그런데 중공 100년 행사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 중공은 공식 건당기념일(7·1 건당절)인 지난 1일 베이징(北京) 천안문광장에서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하지만 중공이 창당대회인 제1차 당 대회를 개최한 날은 21년 7월 23일이다. 중공 중앙당사연구실이 펴낸 『중국공산당역사(1919~49)』(서계 번역출간)에 그렇게 기록돼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이 지난 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이 지난 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렇다면 왜 7월 1일이 건당 기념일이 됐을까? 중국 인민망의 중국공산당신문(뉴스) ‘중국공산당의 성립’ 부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마오쩌둥(毛澤東)이 1938년 5월 옌안(延安)에서 내놓은 ‘지구전을 논하다’에서 7월 1일을 창당 기념일이라고 언급한 게 계기라는 것이다.

그 뒤 1941년 6월 중공 중앙위원회 문건에서 ‘창당 20년, 7·7절 4년’이라고 표현하며 그날 기념식을 하기로 하면서 이날로 정착됐다. 7·7절은 37년 7월 7일 베이징(당시는 베이핑·北平) 서남쪽의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벌인 도발로 중일전쟁이 시작된 날이다. 역사적 사실보다 당과 지도부의 권위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고개가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중공의 무오류주의도 문제다. 중공과 중국은 건국 초기 당과 지도자의 실수로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미국 하버드대의 중국사 석학인 존 킹 페어뱅크는 저서 『신중국사(수정증보판)』 (까치 번역 출간)의 ‘대약진운동(1958~60년)’ 장에서 “대략 2000만~3000만 명이 중공에 의해서 강행된 정책 때문에 영양실조와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고 서술했다. 페어뱅크는 “사망률의 증가를 보여주는 통계 숫자만 보더라도 이것은 인류가 경험한 대재앙의 하나임이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중국계 미국 역사학자인 이매뉴얼 C.Y. 쉬(徐中約)는 『근-현대 중국사-인민의 탄생과 굴기』(까치 번역 출간)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에서 당시 마오쩌둥이 “15년 이내에 영국의 공업생산력을 따라잡거나 심지어 추월할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적어 마오와 중공의 책임을 분명히 했다.

페어뱅크는 ‘문화대혁명(1966~76년)’ 장에선 “57년 반우파투쟁에서 시작된 중국의 잃어버린 20년의 종말”이라고 표현하고 “대재앙의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대략 1억 명이 거기에 휘말렸다”고 기술했다. 쉬는 81년 6월의 중공 제11기 제6차 중앙위원 전체회의가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지도한 것”이라며 “역사가 이미 판명했듯이 문화대혁명은 지도자가 잘못해 일으켰다”고 보고서에 명시했음을 강조했다.

쉬는 이 시기 중공이 “권력은 부패를 초래하고,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인 부패를 초래한다”는 격언을 명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중공은 문혁을 주도했던 4인방을 단죄한 것 외에는 책임자 처벌이나 재발 방지를 위한 권력 분산 등의 조치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두고두고 정치적·역사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공산당은 눈부신 경제 실적에도 폐쇄적 민족주의와 공세적 대국주의로 좌파 이념의 본류에서 이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공산당은 실질적인 일당독재를 하면서 중국의 정치·사회를 통제하는 유일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방으로부터 인권과 민주주의 분야에서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 이유다. 그러면서 남중국해 해양 영토분쟁으로 동남아시아 국가로부터 지역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평가받는다.

이와 함께 역사에 대한 반성 없는 무오류주의, 과도한 자기중심주의로 전 세계에서 존경을 받는 국가라기보다 경계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소프트파워나 가치가 아닌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운 외교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중공에는 ‘세기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창당 100주년을 이웃 나라들이 반가워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