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조훈현 vs 유창혁 결승전, 일본이 달라진 순간

중앙일보

입력 2021.07.21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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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내 젊은 시절의 일본은 참 근사하고 부러운 나라였다. 대학생 때 바둑 시합하러 일본에 가면 아마추어인데도 거의 칙사 대접을 받았다. 사실 우리 머릿속은 ‘반일’로 똘똘 무장하고 있었지만 그걸 토해낼 기회는 없었다. 부자가 된 일본은 넉넉한 자세로 가난한 이웃 나라의 반일감정을 완화시키는 데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도쿄는 깨끗하고 으리으리했고 설렘이 있었다. 일본기원에 들어서면 말로만 듣던 수많은 전설적 고수들과 오랜 역사가 품어내는 힘에 저절로 압도되었다.

막부 300년이 키운 바둑 저력
93·94년 후지쓰배 이후 내리막

그곳에서 들은 바둑 역사도 재미있었다. 임진왜란의 주역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바둑기사들에게 봉록을 준 사람이다. 그 사실을 대했을 때 머릿속이 복잡했다.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오늘의 도쿄)라는 도시를 새롭게 건설했고 그곳에 기소(碁所)를 설치하여 바둑을 장려했다. 전란이 끝나고 평화가 왔으므로 떠돌이 무사들의 승부욕을 바둑으로 달랜다는 정책이었다.

명인(9단)만이 맡을 수 있는 기소는 전국 바둑기사들의 승급과 봉록을 정하고 어성기를 조직하고 쇼군의 바둑을 지도했다. 이로부터 바둑 가문들은 명인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고 바둑 기술도 나날이 발전했다. 한국, 중국과 달리 일본에서의 바둑은 개인의 성패와 가문의 흥망을 건 치열한 승부가 되었다. 그 집중도는 천지 차이였다. 나는 바둑판 앞에서 피를 토하고 죽은 토혈국 얘기에 감탄하며 일본과 일본바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도나 정책이 문화를 이끈다는 것도 실감했다. 막부 300년의 저력은 고스란히 일본기원으로 이어졌다.

우리 한국이 슬슬 잘살게 되고 바둑도 슬슬 이기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변했다. 1993년 일본이 주최하는 후지쓰배 세계대회에 한국의 조훈현 9단과 유창혁 9단이 결승에 올랐다. 1회에서 5회까지 일본이 우승을 휩쓴 후지쓰배인데 6회 대회서 이변이 일어났다. 일본바둑의 심장인 도쿄에서 한국기사끼리 결승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금성철벽 같던 일본바둑의 권위가 일본 바둑팬들 코앞에서 무너지는 사건이었음에도 별다른 동요는 감지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일본기원 해설장은 정장을 한 바둑팬들로 만원이었다(비슷한 케이스가 서울에서 벌어졌을 때 우리 해설장은 적막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은 이때까지만 해도 대국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해 도쿄의 후지쓰배 결승에 조훈현과 유창혁이 또다시 올랐다. 일본기원은 비로소 썰렁해졌다. 대신 서쪽의 오사카에서 조총련 인사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너무 통쾌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지금 달려갈 테니 저녁을 함께하자. 우리는 남북 얘기는 한마디 안 하고 바둑 얘기만 하며 저녁을 보냈다. 이후 일본바둑은 철저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닦아 놓은 기반도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한국인이라면 대개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좋은 일본과 미운 일본이 있다. 좋은 일본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다. 내 마음속의 변곡점은 93년과 94년 후지쓰배 결승전이다. 그 이후 일본은 사과와 망언을 반복했고 독도와 욱일기 등 실망스러운 일들이 꼬리를 이었다. 대학생 때 본 일본은 한국에 대해 꽃잎 하나라도 떨어질세라 조심하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쪽박이 깨져도 좋다며 혐한 소동을 벌인다. 이번에 문제가 된 일본 공사의 발언은 자기파괴의 냄새마저 짙게 풍긴다. 일본이 어디가 아픈 것일까. 왜 저렇게 초조하고 화난 모습일까.

그래도 나는 일본의 좋은 기억 쪽에 기대를 건다. 막연하나마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운 평범한 일본 사람들과 잔잔한 시골풍경이 아직 저쪽에 남아있다. 코로나가 끝나면 지진을 만나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 못한 홋카이도와 눈 덮인 니가타 지방을 다시 가보고 싶다. 바둑도 예전처럼 강해지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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