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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창당 100년을 마냥 축하할 수 없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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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이 대장정 중이던 1959년 1월 15~17일 구이저우(貴州)성 쭌이(遵義)에서 개최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장면을 1997년 그린 상상화.마오쩌둥(毛澤東, 왼쪽에서 둘째)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보인다. 이 쯘이회의는 마오가 소련 유학파와 코민테른에서 보낸 독일인 오토 브라운 등을 누르고 중공의 당권을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 사진=중국혁명박물관

중국 공산당이 대장정 중이던 1959년 1월 15~17일 구이저우(貴州)성 쭌이(遵義)에서 개최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장면을 1997년 그린 상상화.마오쩌둥(毛澤東, 왼쪽에서 둘째)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보인다. 이 쯘이회의는 마오가 소련 유학파와 코민테른에서 보낸 독일인 오토 브라운 등을 누르고 중공의 당권을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 사진=중국혁명박물관

중국공산당(중공)이 지난 1일 창당 100년을 맞아 성대한 축하 행사를 열었다. 이날은 중국공산당에는 세기의 경축일이다. 미국 민주당(1828년)·공화당(1854년), 영국 보수당(창당 1834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1847년), 인도 국민회의(1885년),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188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프리카국민회의(1912년)·국민당(1914년), 대만 중국국민당(1919년)에 이어 100년 정당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창당 23일인데 기념일은 1일 #진실·이념보다 권위 앞세우나 #대약진운동·문혁 오류반성 없어 #경제성과·중화민족주의만 강조 #동남아 등 주변국 압박도 지적

상하이 중공 건당 유적지. 사진=위키피디아

상하이 중공 건당 유적지. 사진=위키피디아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두 차례에 걸친 국·공 합작과 옌안(延安) 대장정, 항일전쟁, 국공내전 등을 거쳐 1949년 베이징을 수도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그 뒤 대약진 운동(1958~60년)과 문화대혁명(66~76년)이라는 불행한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개혁·개방을 추진해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키웠다.

지난 6월 28일 베이징 국가체육관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공연 도중 시진핑 주석의 얼굴이 대형 전광판에 비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6월 28일 베이징 국가체육관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공연 도중 시진핑 주석의 얼굴이 대형 전광판에 비치고 있다. [AP=연합뉴스]

중국은 명목금액 기준 국제통화기금(IMF) 2021년 국내총생산(GDP) 예상치가 16조6400억 달러로 미국(22조6752억 달러)로 세계 2위다. 일본(5조3781억 달러), 독일(4조3192억 달러), 영국(3조1246억 달러), 인도(3조497억 달러)보다 앞선다. 2020년 수출 2조5900억 달러에 수입 2조600억 달러의 무역대국으로 국제적 영향력이 크다. 14억4399만 명의 인구의 중국은 2021년 1인당 GDP 예상치가 1만1819달러로 세계 평균을 넘었다.

6월 19일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의 난니완(南泥灣) 개간지에 세운 중국공산당 입체 휘장 구조물 앞에서 팔로군 복장을 입은 당원들이 플래카드를 앞세워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신경진 기자

6월 19일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의 난니완(南泥灣) 개간지에 세운 중국공산당 입체 휘장 구조물 앞에서 팔로군 복장을 입은 당원들이 플래카드를 앞세워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신경진 기자

창당대회는 7월 23일인데 기념일은 1일?

중공 100년 행사를 보고 있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 중공은 지난 1일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상대한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1일은 중공의 공식 건당기념일(7·1 건당절)이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창당대회인 제1차 당대회를 개최한 날은 1921년 7월 23일이다. 중공 중앙당사연구실이 펴낸 『중국공산당역사(1919~1949)』(서계 번역출간)에 그렇게 기록돼 있다.
이날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외국인 치외법권 지역)의 망지로(望志路) 106번지(현재 흥업로(興業路) 76번지)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전국에 57명 있었다는(50여 명으로도 알려졌으며, 지금까지 41명이 밝혀졌다) 당원을 대표하는 13명과 창당대회인 1차 당대회 개최를 요청한 외국인 코민테른 요원 2명 등 모두 15명이 모였다. 그런데 마지막 날인 7월 30일 밀정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회의장을 둘러보고 나간 다음 조계 경찰이 현장을 포위하고 수색했다.

중공 초대 위원장 천두슈.  사진=위키피디아

중공 초대 위원장 천두슈. 사진=위키피디아

이들은 상하이에서 서남쪽으로 100㎞쯤 떨어진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에 있는 난후(南湖)의 놀잇배로 옮겨 대회를 마쳤다. 이들은 당의 기본 임무와 민주집중제 등 조직원칙, 규율 등을 담은 중국공산당 강령을 채택했다. 천두슈(陳獨秀)가 중앙집행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그렇다면 왜 7월 1일이 건당 기념일이 됐을까? 중국 인민망의 중국공산당신문(뉴스) ‘중국공산당의 성립’ 부문에 그 이유가 적혀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1938년 5월 옌안(延安)에서 내놓은 ‘지구전을 논하다’에서 7월 1일을 창당 기념임이라고 언급한 게 계기다.
그 뒤 1941년 6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건에서 ‘창당 20년, 7·7절 4년’이라고 표현하며 그날 기념식을 하기로 하면서 이날로 정착됐다. 7·7절은 37년 7월 7일 베이징(당시는 베이핑(北平)) 서남쪽의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벌인 발포로 중일전쟁이 시작된 날이다. 실제 창당한 날짜보다 당과 지도부의 권위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고개가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7월 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연회색 마오복 차림의 시진핑(가운데) 중국 국가주석이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7월 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연회색 마오복 차림의 시진핑(가운데) 중국 국가주석이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처형·탈당·출당·배반…창당대회 참석 당원의 운명

1차 당대회에 참석했던 13인의 중국인 공산당원은 지역별로 베이징의 류런징(劉仁靜)·장궈타오(張國燾), 상하이의 리한쥔(李漢俊)·리다(李達), 산둥(山東)의 왕진메이(王燼美) 덩언밍(鄧恩銘), 후베이(湖北)의 둥비우(董必武)·천탄추(陳潭秋), 후난(湖南)의 마오쩌둥(毛澤東)·허수헝(何叔衡), 광둥(廣東)의 천궁보(陳公博)·바오후이성(包惠僧), 재일중국인대표 저우포하이(周佛海) 등이다. 이들은 각자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창당 당원 13명 중 당의 지도자로 남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본 사람은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년, 45~76년 중공 주석)과 둥비우(董必武, 1886~1875, 65~75년 중국 부주석)밖에 없다. 나머지는 숨지거나 당을 떠났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처안문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왼쪽).뒤에 건당 동지인 등비우가 서있다. 사진=위키피디아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처안문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왼쪽).뒤에 건당 동지인 등비우가 서있다. 사진=위키피디아

5명이 공산당 활동과 관련해 숨졌다. 리한쥔은 탈당 뒤에도 국민당의 의심을 받다 27년 체포돼 처형됐다. 허수헝은 35년 장시(江西) 소비에트에서 국민당과 교전 중 포위되자 절벽에 투신했다. 천탄추는 43년 신장에서 마오쩌둥의 동생인 마오쩌민(毛澤民)과 함께 군벌에 체포돼 살해됐다. 귀저우(貴州) 소수민족인 수이(水貴)족 출신의 덩언밍은 31년 산둥에서 국민당군에 총살당했다.

상하이 출신 리한쥔은 도쿄제국대 출신으로 중국공산당 창당대히에 참가했지만 베이징 출신의 장궈도와 불화 끝에 탈당했다. 국민당에서 일하다 공산당 숙청 당시 처형을 당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상하이 출신 리한쥔은 도쿄제국대 출신으로 중국공산당 창당대히에 참가했지만 베이징 출신의 장궈도와 불화 끝에 탈당했다. 국민당에서 일하다 공산당 숙청 당시 처형을 당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장궈다오·리한쥔·류런징 3인은 공산당으로부터 출당 당했다. 형의 집을 1차 당대회 장소로 제공했던 리한쥔은 장궈타오와 불화를 겪은 끝에 탈당하고 국민당으로 옮겼다. 그와 불화했던 장궈다오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해 소련 노선을 추종했다. 농촌혁명을 주장하는 마오쩌둥과도 사사건건 대립했다. 대장정에 참여해 36년 연안에 갔지만 38년 탈주해 국민당에 투항했다. 49년 공산당이 대만을 제외한 본토 대부분을 장악하자 홍콩을 거쳐 캐나다로 망명했다. 이들은 스스로 당을 떠났고 당도 이들을 출당 조치하고 제명했다.
류런징은 독특한 경우다. 소련에 유학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고 귀국하다 터키에서 레온 트로츠키를 만나면서 트로츠키파로 분류돼 출당을 당했다. 국민당에 포로로 잡히면서 반공 활동을 했지만 49년 신중국 건국 뒤 자아비판을 하고 대륙에 남았다. 소련 공산당의 당내 투쟁이 중국으로 번진 셈이다.
창당대회 참석자 중 탈당한 사람은 장궈다오·리한쥔을 포함해 6명이다. 리다는 29년 탈당했다가 49년 복당했지만 문화대혁명 당시인 66년 홍위병의 폭행으로 숨졌다. 바오후이성은 국공분열 뒤인 27년 탈당하고 국민당 정부에서 고위 관리로 일하다 신중국이 건국되자 베이징에서 관리를 지냈다.
저우포하이와 천궁보는 공산당에서 탈당하고 40~44년 존속한 왕징웨이(汪精衛)의 친일 괴뢰정권에서 고위직을 맡아 한간(漢奸·중국인 매국노)으로 통한다. 천궁보는 46년 처형됐고, 저우포하이는 48년 무기직영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옥사했다. 이념 앞에 인간들이 보여준 다양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소련이 보낸 외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창당 지도

중국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1919년 5·4운동을 계기로 동아리 수준의 지역 공산당 세포조직을 만들었다. 하지만 전국 단위 조직활동이나 혁명 경험은 없었다. 이들을 지도해 전국 단위의 중국공산당을 만든 것은 소련이 주도한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이었다. 코민테른에서 중국에 파견한 마링(馬林)이라는 인물이 중공 창당대회인 1차 당대회를 이끌었다. 중공 창당은 공산주의의 세계 확산이라는 소련 공산당의 치밀한 계획하에 이뤄진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공은 소련이 기획 창당한 공산당 중 드물게 100년을 버텼다.

마링. 네덜란드 공산주의자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시로 중국에 파견돼 중공 창당을 이끌었다.  사진=위키피디아

마링. 네덜란드 공산주의자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시로 중국에 파견돼 중공 창당을 이끌었다. 사진=위키피디아

마링은 본명이 헨데리크 스네블리트(1883~1942년)로 네덜란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본국에서 철도 노동자로 노동운동을 하다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로 옮겨 마르크스주의를 동남아시아에 처음 전파했다.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시로 중국에 파견된 그는 중국 공산당 창당을 목표로 낯선 중국에서 움직인 끝에 창당대회를 열 수 있었다. 스네블리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에서 공산주의계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다 42년 독일군에 잡혀 동료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니콜스키라는 가명으로 상하이 중공 창당대회에 참석해 축하 연설을 했던 코멘테른 요원 블라디미르 네이만,.사진=위키피디아

니콜스키라는 가명으로 상하이 중공 창당대회에 참석해 축하 연설을 했던 코멘테른 요원 블라디미르 네이만,.사진=위키피디아

1차당대회에는 니콜스키로 불린 러시아인이 참석해 연설까지 했다. 니콜스키는 블라디미르 네이만(1898~1938)이 본명으로 코민테른 극동국 서기였다. 그는 소련으로 돌아갔다가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 벌어진 대숙청에 휘말려 38년 극동 하바롭스크에서 간첩 혐의로 총살당했다. 스탈린 사후인 56년 복권됐다.

지난 1938년부터 1943년까지 마오쩌둥이 은거했던 옌안 양자링(楊家嶺) 근거지의 토굴 유적지에 걸려있는 마오쩌둥과 장칭 부부 사진.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을 맞아 혁명 유적을 순례하는 당원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신경진 기자

지난 1938년부터 1943년까지 마오쩌둥이 은거했던 옌안 양자링(楊家嶺) 근거지의 토굴 유적지에 걸려있는 마오쩌둥과 장칭 부부 사진.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을 맞아 혁명 유적을 순례하는 당원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신경진 기자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은?

중공과 중국은 건국 초기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당과 지도자의 실수로 인민이 고초를 겪었다. 미국 하버드대의 중국사 석학인 존 킹 페어뱅크는 저서 『신중국사(수정증보판)』(까치 번역 출간)의 ‘대약진운동(1958~1960년)’ 장에서 “대략 2000만~3000만 명이 중공의 의해서 강행된 정책 때문에 영양실조와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고 서술했다. 페어뱅크는 “사망률의 증가를 보여주는 통계 숫자만 보더라도 이것은 인류가 경험한 대재앙의 하나임이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중국계 미국 역사학자인 이매뉴얼 CY 쉬(徐中約)는 『근-현대 중국사-인민의 탄생과 굴기』(까치 번역 출간)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에서 당시 마오쩌둥이 “15년 이내에 영국의 공업생산력을 따라잡거나 심지어 추월할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적어 마오와 중공의 책임을 분명히 했다.

대장정 당시의 마오쩌둥. (말을 탄 사람). 사진=위키피디아

대장정 당시의 마오쩌둥. (말을 탄 사람). 사진=위키피디아

페어뱅크는 ‘문화대혁명 1966~1976년)’ 장에선 “1957년 반우파투쟁에서 시작된 중국의 잃어버린 20년의 종말“이라고 표현하고 “대재앙의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대략 1억 명이 거기에 휘말렸다”고 기술했다. 쉬는 81년 6월의 중공 제11기 제6차 중앙위원 전체회의가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지도한 것”이라며 “역사가 이미 판명했듯이 문화대혁명은 지도자가 잘못해 일으켰다”고 보고서에 명시했음을 지적했다. 쉬는 이 시기 중공이 “권력은 부패를 초래하고,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인 부패를 초래한다”는 격언을 명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중공은 문혁을 주도했던 4인방을 단죄한 것 외에는 책임자 처벌이나 재발 방지를 위한 권력 분산 등의 조치는 없었다. 중공에는 두고두고 정치적·역사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6월 28일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 전야제  중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AFP=연합뉴스

6월 28일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 전야제 중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AFP=연합뉴스

중공 굴기 100년…공산당 이념의 실현인가?

중국공산당의 100년과 그 체제는 중국을 바꿨지만, 세계적으로 영향을 주진 못했다. 중공을 이끈 마오쩌둥의 사상의 해외 확산 현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다. 농촌을 혁명의 핵심으로 삼은 마오의 영향을 받은 폴 포트는 75~79년 캄보디아를 통치하면서 도시 주민을 농촌으로 강제로 이주시키고 지주·자본가·지식인·반대파 등 200만 명을 대량 학살한 ‘킬링필드’를 일으켰다. 페루공산당에서 분리된 마오주의 분파 ‘빛나는 길’은 농촌을 기반으로 무장투쟁을 하다 소멸했다. 네팔에선 마오주의 공산 반군이 게릴라전을 벌이다 제도권 정치에 편입됐다. 이처럼 국제적으로는 일부 개발도상국의 실패한 공산당에 영향을 주는 데 그쳤다는 평가다. 전 세계에 영향을 줬던 볼셰비키 혁명과 달리, 중국공산당의 100년 역사는 국내용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중국공산당은 눈부신 경제 실적에도 폐쇄적 민족주의와 공세적 대국주의로 좌파 이념의 본류에서 이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공산당은 실질적인 일당독재를 하면서 중국의 정치·사회를 통제하는 유일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방으로부터 인권과 민주주의 분야에서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 이유다. 그러면서 남중국해 해양 영토분쟁으로 동남아시아 국가로부터 지역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평가받는다.
이와 함께 역사에 대한 반성 없는 무오류주의, 과도한 자기중심주의로 전 세계에서 존경을 받는 국가라기보다 경계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소프트파워나 가치가 아닌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운 외교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엔 ‘세기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건당 100년을 이웃나라들이 마냥 축하할 수는 없는 이유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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