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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비전은 없고 정치공학만 남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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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2007년 1월, 고건 전 총리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한때 지지율 30%대를 넘나든 여권의 강력한 대선주자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행정가인 그가 퇴장한 데 대해 권력의지가 약했다는 분석이 있지만, 문제는 비전 부족이었다. 추락하는 노무현 정부를 이어받아 나라를 어떻게 바로 세우겠다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해 4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었지만,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하겠다는 비전이 없었다. 집값을 어떻게 잡을 건지, 교육을 어떻게 고칠 건지, 연금을 어떻게 손볼 건지…. 이런 난제에 대해 손에 잡히는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국민은 냉정했다. 최고의 행정가, 최고의 지성이라는 간판이 통하지 않았다.

G7 넘보는 국가의 수준이하 대선판 #정책 대결 실종, 네거티브 난무 #‘이것을 이렇게 고치겠다’ 안 보여 #준비 덜된 후보들, 대한민국의 불행

가까운 예로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있다. 충청 대망론을 등에 업고 2016년 지지율 1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2017년 초 대선 링에 오르자마자 허망하게 기권패했다. 외교관 특유의 신중함, 넉넉지 않은 자금력 등 여러 패인이 오르내렸다. 문제의 핵심은 비전 부족이었다. 양극화, 청년실업, 저출산·고령화 등 현안을 ‘이렇게 풀겠다’는 게 없었다. 화려한 경력이나 공허한 구호, 이미지 정치로는 민심을 잡을 수 없다.

다시 대선의 계절이 돌아왔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복의 연속이었다. 이번에도 ‘죽느냐 사느냐’의 처절한 싸움이다. 입에 올리기 거북한 사생활 들추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저질 유튜버들이 돈벌이를 위해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로 판을 키운다. 막말 정치꾼들은 자극적인 촌평으로 자신의 얼굴 알리기에 바쁘다. 정책 대결은 실종됐다. 겨우 하나 보이는 게 기본소득 공방이다. 국정 현안이 기본소득밖에 없는지 의아하다.

대선주자들은 핵심을 비껴간 얘기를 한다. 여권 선두주자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바지 한 번 더 내릴까요”는 온 국민을 무참하게 만든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에 대해 “(국회에서) 과감하게 날치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 지사는 ‘사이다’ 발언이라고 자평하겠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선은 불안하다. 대통령을 오래 준비했지만, 무릎을 칠만한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여권 주자들은 친문의 적자를 자처하기 바쁘다. 이낙연·정세균 전 총리는 “내가 민주당 적통”이라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혈통 싸움을 한다. 집값 폭등에 대해선 개인 택지소유 제한(이낙연) 등 반시장 대책을 쏟아낸다. 여당이 정권을 잡으면 ‘부동산은 더 오르겠구나’란 생각이 절로 든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 공격에 집착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 탓만 하는 문재인 정부의 연장선상이다.

야권 주자들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윤 전 총장의 출마선언문은 반(反)문재인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말한 “약자가 기죽지 않는 나라, 자유시장 경제 존중”은 ‘좋은 대통령이 되겠다’ 수준의 선문답이다. 구체적이고 현실감 넘치는 처방은 아직 없다. “곧 핵심 정책과 공약을 발표하겠다”고 했지만, 그의 비전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통합의 정치를 하겠다”(최재형 전 감사원장), “정치 세력을 교체하겠다”(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도 과거 수많은 대선주자들이 외친 구호 수준이다. 감사원장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된 최 전 원장이 갑자기 국정 전반에 통찰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김 전 부총리는 실패한 경제정책, 소득주도 성장을 진두지휘했다. 그 부분을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하면 자기모순에 빠질 것이다. 그나마 대선주자 중에 여야를 통틀어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이 돋보인다. 현안에 대해 자기 생각이 잘 정리돼 있다. 아직은 단기필마다. 리더라기보다 훌륭한 리더를 만나면 맹활약할 수 있는 특급 참모에 가깝다.

비전 부족을 빈농의 아들(이낙연·정세균), 소년공(이재명), 고졸 신화(김동연) 등 휴먼스토리로 덮어보려는 의중도 읽힌다. 한물간 전략이다. 빈농의 아들(박정희·노무현·이명박), 고졸 신화(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여러 차례 겪어봐서 국민이 더 잘 안다. 빈농의 아들이 대통령을 잘하란 법은 없다. 실용을 중시하는 MZ세대는 이런 구닥다리 스토리에 감동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여야의 대선주자들이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미래보다는 과거에 매달린다. 상대방 말꼬리를 잡는 데 급급해 한다. G7(주요 7개국)을 넘보는 국가의 대선인데, 낯뜨거운 네거티브 공방이 이어진다. 문재인 정부에서 난마처럼 얽힌 현안을 줄줄 꿰고, ‘이것을 이렇게 고치겠다’고 소신껏 답하는 대선주자는 보이지 않는다. 국정 철학의 빈곤이요, 어젠다의 실종이다. 실력이 모자라니 정치공학에 몰두한다. 재난지원금을 늘리면 인기가 올라갈지, 갈라치기를 하면 내 편이 결집할지, 경선 일정을 늦추는 게 나을지, 누구와 단일화해야 할지, 언제 입당하는 게 유리할지…. 국민은 염증을 느낀다. 네거티브와 정치적 셈법, 진영논리만으로 대권을 잡으면 금세 길을 잃고, 남 탓만 하는 실패한 정권이 되기 십상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갈수록 대통령의 격(格)이 떨어지는 느낌은 필자만 갖는 걸까. 대한민국의 불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