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남정호의 시시각각

문 대통령 방일 무산 유감

중앙일보

입력 2021.07.20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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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이 시작된 당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개막식 참가차 방한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정상회담을 가졌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지난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이 시작된 당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개막식 참가차 방한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정상회담을 가졌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의 도쿄 올림픽 참석이 결국 무산했다. 한·일 정상회담의 성과가 미흡할 거로 보이는 데다 최근 일어난 일본 공사의 부적절 발언도 걸림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대승적으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스포츠에 정치를 덧대는 건 온당치 않다. 평창 동계올림픽 직전인 2018년 1월 "스포츠가 정치와 이념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세계에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 장본인이 문 대통령 아니었나. 그랬던 그가 한·일 정상회담 성과를 이유로 도쿄 올림픽에 안 간다면 또 한 번의 내로남불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스포츠에 정치 개입시켜선 안 돼
평창 올림픽 때 아베 온 전례 있어
한·일 화해 위한 토대 마련도 중요

게다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는 위안부 합의 파기 문제로 한·일 관계가 험악했음에도 한국을 찾았다. 내부 반대를 뿌리치고 말이다. 이런 판에 문 대통령이 일본에 안 가면 옹졸하단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난마처럼 얽힌 한·일 간 난제를 정상 간 담판으로 매듭짓겠다는 전략은 외교의 본질을 도외시한 발상이다. 즉흥적이고 원맨쇼 스타일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겐 통할지 모르지만 스가 정권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정상회담에서의 합의는 수개월에 걸친 사전 물밑 작업 끝에 나오는 것이 원칙이다. 양측 실무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절충안을 마련하면 이를 양측 정부에서 수락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게다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는 결코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없는 신중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에게 다짜고짜 "일본에 갈 테니 수출규제·원전 오염수 방출·강제징용 및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 중 최소한 한 개는 양보하라"고 요구한들 통할 리가 없다.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 19일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를 성적 행위로 비유한 소마 히로히사 주한 총괄공사의 발언과 관련, ″어떠한 상황, 문맥 하에서 한 것이라도 외교관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라며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2일 기자회견 당시의 가토 장관 모습. [교도=연합뉴스]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 19일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를 성적 행위로 비유한 소마 히로히사 주한 총괄공사의 발언과 관련, ″어떠한 상황, 문맥 하에서 한 것이라도 외교관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라며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2일 기자회견 당시의 가토 장관 모습. [교도=연합뉴스]

 외교란 본디 '국가 간 협상'과 '국내 정치'라는 두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양면 게임이론'을 구체화한 이는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대 교수였다. 퍼트넘은 국가 간 회담이 성공하려면 양쪽 모두 협상을 통해 얻는 국익이 양보해주는 사안보다 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협상이 타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각국 대표들이 국내 정치세력과 이익단체 등의 압력, 또는 다른 제약 조건에 좌우될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소신 있는 협상이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흥미로운 건 이 같은 외부 압력이나 제약 조건을 핑계로 각 나라가 자기 쪽이 양보할 수 있는 범위를 대폭 줄이는 전략을 쓴다는 대목이다. 예컨대 농산물 개방 문제로 미국과 협상을 할 경우 "농민들의 반발이 워낙 커 쌀만은 열 수 없다"고 버티는 식이다.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 현 정부가 대법원 확정판결을 내세우며 양보할 뜻이 전혀 없음을 거듭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8년 "강제징용 문제는 사법부의 판결"이라며 "일본만큼 3권분립이 확고한 한국 정부도 이 부분을 존중해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스스로 운신의 폭을 확 줄인 셈이다. 그러니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 정부와 상대하지 않겠다는 일본 측과 타협할 도리가 없다.
임기 5년의 문재인 정권은 이미 4년 2개월을 보냈다. 대선 이후 권력이 당선자에게 확 쏠리는 점을 감안하면 힘쓸 수 있는 시간은 7개월 남짓 남았다. 인생으로 치면 황혼기다. 위대한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잘 늙는 열 가지 방법'을 소개했다. 그중 아홉 번째는 '건설적으로 물러날 것', 열 번째는 '다음 세대에 자리를 물려줄 것'이다. 퇴장이 멀지 않은 문 정권도 임기 내에 뭔가 보여주겠다는 강박 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다. 특히 긴 안목이 필요한 외교 분야는 더더욱 그렇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충고한다. "끝마치지 못한 일은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못한 일은 다음 사람들이 끝마쳐 줄 것이다"라고. 보수든 진보든, 다음 정권이 꽉 막힌 한·일 관계를 원만하게 풀도록 토대를 닦아주는 것 자체 만으로 문 정권으로서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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