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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식량난과 델타 변이 위협에 놓인 북한, 지도자 위신부터 챙겼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북한은 지난 6월 세계보건기구(WHO)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의심스럽지만 적어도 대량 확산은 피한 듯하다). 그러나 델타 변이는 북한의 상황을 곧 바꿔버릴 수 있다. 삼중 방어선 가운데 첫 번째와 세 번째 방어선을 약화하기 때문이다.

수척한 김정은에 우는 주민 방영 #조직적 분노 막는 단기대처만 해

첫 번째 방어선은 중국·러시아와 국경이 맞닿은 완충지대이다. 이곳에 코로나19가 퍼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두 번째 방어선은 주민들의 거의 모든 이동을 금지하는 전면 방어다. 최후의 방어선은 감염자의 철저한 고립과 접촉자에 대한 신속한 추적으로, 중국과 유사하다. 현재 델타 변이가 러시아 극동 지역까지 퍼진 건 거의 확실하다. 지난달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에선 변이 바이러스 확산에 대비하기 위한 병원이 설립됐다. 인접한 중국 영토 내로의 확산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첫 번째 방어선인 완충지대가 위태로워진 거다. 세 번째 방어선도 거의 쓸모없어진다. 델타 변이가 ‘추격전’보다 더 빨리 이동하는 방법을 터득해서다. 사실 이전에도 북한 간부들이 발생 사실을 인정하길 두려워해 확산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을 수 있다.

이런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6월 전원회의에서 “식량 형편 긴장”을 언급했고,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같은 달 14일 북한이 올해 86만t의 식량이 부족할 것으로 관측했다. 이것도 큰 문제이지만 이로 인해 주민들이 방역수칙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 식량 밀매에 나서면서 결과적으로 코로나 확산 위험을 높일 수 있다.

델타 변이 때문에 전면 방어의 중요성이 높아졌으나 이 역시 약화할 공산이 크다. 6월 18일 조선중앙TV는 김 위원장이 군량미를 풀어 주민들에게 배급하라는 ‘특별명령’을 내리는 장면을 방송했다. 북한 군인은 적어도 식량만큼은 소박한 수준이라도 매일 얻을 수 있었다. 군량미를 나눠준다는 소식은 군의 사기를 저하할 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국경 횡단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뇌물을 챙기겠다는 유혹을 키울 수 있다.

북한 정권은 그런데도 식량 확보 노력을 더 하는 대신 정치적 타격을 피하는 데 골몰한 듯하다. 김 위원장이 식량 문제 해결에 애쓰고 특별명령을 하는 방송을 내보낸 데 이어 김 위원장의 수척해진 모습에 눈물짓는 주민 인터뷰도 방영했다(먹을 것이 없어 김 위원장의 체중이 줄었다는 발상은 거의 우습기까지 하다). 거리에선 새로이 ‘반사회주의 행태’를 집중 단속하는데, 여기엔 식량 거래나 식량 확보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까지 포함됐다.

북한 정권은 백신 보급에도 효과적이지 않았다. 7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북한에 백신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북한이 아직 요청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코백스(COVAX, 백신 공동 구매·배분 위한 국제프로젝트)와의 협상을 몇 달째 지연시키고 있다. 북핵 협상처럼 상대가 양보하길 바라며 강경노선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수많은 나라도 상대해야 할 코백스로선 물러설 수 없다.

북한이 최고지도자의 평판을 챙기고 주민들을 억압하는 게 낯부끄러운 일이긴 하나 정권의 관점에선 타당할 순 있다. 이들에게 실질적 위험은 기아나 전염병이 아니라, 기아나 전염병이 야기하는 사회적 불안이 정권에 대한 조직적 분노로 변하는 것이다. 단기적으론 정권의 권위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는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다. 상황이 더 나빠져 ‘혹독하게 어려운 시기’(FAO)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북한 정권이 어떤 정치적 마법을 쓰더라도, 얼마나 엄혹한 상황인지 지도층이 얼마나 완벽하게 잘못해왔는지 주민들을 더는 속일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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