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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늙으니까 아프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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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과 교수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과 교수

2010년 12월 말에 출판되어 벌써 10여 년이 지난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마도 그 제목에서 큰 성공의 유명세를 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단지 제목만을 마주하며 가졌던 나의 첫 인상은 솔직히 공감보다는 반감에 가까웠다. 제목을 듣는 순간 나는 내용은 제쳐두고, 근거 없는 반발심으로 책을 하나 써야겠다는 생각에, 그 제목을 ‘늙으니까 아프다!’로 결정하고 있었다. 물론 이 책은 쓰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청춘’의 시간을 지나 지금처럼 나이 들고 보니 정말로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주변의 물건들이 녹슬고 닳아 해지는 것처럼, 사람도 늙어간다는 것은 조금씩 기력이 쇠하면서 쑤시고 아픈 곳들이 더해가는 것 같다.

죽기 전까진 언제나 청춘 #사람이 사람다워야 하듯 #내게 걸맞는 나다움 찾아야

그렇게 나이 들어서는 몸 구석구석에서 “약 좀 달라”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무엇보다도 앉았다 일어설 때면 ‘어디 갈 것’도 아닌데, 왜 그리도 한숨어린 “아이고” 소리를 달게 되는지. 어렸을 적, 혹은 나도 한때였던 청춘 시절에 집에 계시던 할머니의 잦은 “에구구” 소리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는 늙어서도 절대 저런 소리를 내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 번에 벌떡 앉고서는 것도 못하시고, 느릿한 움직임으로 어눌함에 얹어진 답답함 마저 주실 때, 그런 일들이 언젠가는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털썩 주저앉기는커녕 몸만 조금 구부렸다 펴도 ‘끄응’ 소리가 추임새 장단처럼 무심결에 흘러나온다. 몸의 움직임은 둔해지고, 어딘가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는 내 몸이 악기인양하시라도 협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늙으니까 아픈 것이다. 하지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 말에 익숙한 우리들은, 젊다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 시절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준비의 과정에서 의당 거쳐야할 고통의 통관 의례로, 아픔의 미학으로 승화될 가학적 전제로 받아들이라 한다. 그렇다고 아픔을 담보로 지내온 그 젊은 시절을 벗어난 지금, 그 아픔이 송두리째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청춘에 내어준 (당연한) 아픔 때문에 늙어서 얻게 된 지금의 고통은 무시되어도 좋다는 이상한 역설만 성립시키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는 일생동안 아픈 일도 있고, 웃음으로 채워지는 시간들도 있으며,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고 절망하는 때도 있다. 거기에 하루하루 시간을 지내며 속절없이 늙어간다는 것이 아픈 청춘을 디딤돌 삼아 지내오는 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게다. 그때그때의 나이에 겪게 되는 특유의 ‘성장통’ 같은 아픔이 있어 청춘들에게 자연스럽고 익숙한 아픔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이 청춘이라서 더 아프고 당연해야 한다는 진단은 그리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삶이 다하게 되지 않는 한, 우리의 성장도 멈추지 않는다. 때문에 젊다는 것만으로 사랑의 아픔을 견디고, 성공을 향한 기로에서 실패를 맛본 좌절에 고통받을 특권을 가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어야 한다. 여느 TV 프로그램에서 “청춘이란?” 주제로 인터뷰 중 질문을 받은 한 어르신의 답은 명쾌했다. “안 죽으면 청춘이야!”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살아온 시간의 길이가 더해져서 그 안에 쌓여가는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다채로워질 수 있음을 말하고, 그것은 또 일상 속에 마주하는 부대낌에서 여유와 너그러움으로 대처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일 수도. 그렇다고 경험이 적은 젊은이들이 늘 어리석고 틀린 것만은 아니다. 나이 들어서도 ‘나잇값’ 못하는 어른들도 얼마든지 있고, 어린 나이이지만 속 넓고 사려 깊은 헤아림이 있는 젊은이들 또한 많다. 오히려 ‘젊다’ 혹은 ‘늙었다’는 편협한 틀 안에 생각을 가두고 서로를 향한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일그러진 가치관으로 방향도 없이 몰아세우는 것은 아닌지. 모두에게 한때였던 과거와 앞으로 겪을 미래의 모습은 결국 시간의 거울 속에서 서로를 비추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일 텐데.

청춘이기에 아파야 한다는 억지스런 강변보다는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그때그때에 걸맞은 ‘우리다운’ 모습들을 찾아 스스로를 비춰 보일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젊은이는 젊은이답고, 노인은 노인답고. 그렇지만 나에게 걸맞은 “나다움”을 찾는 것 또한 결코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하는 것처럼 ‘나를 나답게’라는 이렇게 자연스럽고 당위적인 논리의 항진명제가 왜 또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