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경태의 이코노믹스

공정성 확보 못하면 능력 발휘 못하고 산업생태계 후퇴

중앙일보

입력 2021.07.20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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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경제학에서 보는 공정과 능력주의 논쟁

이경태 전 OECD 대사

이경태 전 OECD 대사

공정은 경제에서 친숙한 용어다. 공정경쟁·공정무역·공정거래·공정소비 등 경제활동이 공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오래전부터 강조됐다.

절대적 기회의 평등은 신기루
열심히 하면 성취하는 게 공정
경쟁 대신에 추첨제 할 수 없어
능력주의는 불공정 시정 장치

애덤 스미스는 푸줏간 주인의 박애심이 아닌 이기심 때문에 저녁상에서 미식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만약에 푸줏간 주인이 상한 고기를 속여서 판매한다면 저녁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배가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아파올 것이다. 이러한 불공정 경쟁은 나의 이익이 남의 이익이 되는 상생적 경제 대신에 나의 이익이 남의 손해가 되는 약탈적 경제를 야기한다. 부모 찬스를 악용해 부정입학을 하면 열심히 공부한 다른 학생이 낙방의 쓴잔을 마시는 것과 같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전신인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체제에서 1993년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은 공정무역을 내세워서 개도국을 압박했다. 개발도상국의 정부 보조금을 비롯한 광범위한 산업지원이 불공정하기 때문에 시정하지 않으면 상계관세 등의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했다. 개도국들은 국제경쟁력이 강한 산업이 별로 없는 데다가 시장의 역동성마저 약하기 때문에 정부지원이 불가피하다고 대응했다.

이 상황은 중소기업 지원과 보호가 불공정하다고 항의하는 대기업의 행태와 닮은꼴이다. 대기업이 신생기업의 진입과 성장을 억제하는 것은 기회 평등이라는 공정의 기준을 위반한다. 기업 사다리는 흔들리고 산업생태계는 신진대사가 약해져서 허약한 체질로 후퇴할 것이다.

양극화가 숱한 불공정을 낳고 있는 지금은 공정성의 확보가 경쟁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공정한 경영은 조직원의 충성심과 소속감을 높여서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다. 공정은 코끼리도 춤추게 할 것이므로 숱한 불공정에 찌든 청년들을 고무시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출발선 동일하게 해도 불공정

이경태의 이코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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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공정은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유행어가 되었다. 내년 대선의 예비후보들이 경쟁적으로 공정이 시대정신이라고 강조하면서 표심을 유혹한다. 시대정신은 어떤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정신이고 한 시대가 끝날 때만 알 수 있다고 헤겔이 말했다. 그가 옳다면 예비후보들은 선지자임이 틀림없다.

어느 시대나 불공정은 심각하게 존재했다. 조선의 서얼들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입신양명의 길이 막혔다. 울분에 찬 일생을 보내다가 피가 뜨거웠던 자들은 모반의 대역죄를 불사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자유당 시절에는 ‘백(배경)’ 가진 자들의 병역기피와 채용 비리가 국민의 분노를 샀고 이후에는 입시부정과 불법과외, 여성차별, 재벌 탈세와 갑질 등의 불공정이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공정이 시대정신의 위상까지 차지했던 적은 없었다.

오늘의 시대정신이 공정이라면, 이는 곧 한국사회의 불공정이 도를 넘었고 국민 다수가 공정사회를 목말라하고 있다는 징표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라는 명언으로 심금을 울렸다. 그런데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기회는 독점하고 과정은 반칙이고 결과는 불의의 사회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불공정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인생 고비마다 불공정 위험 존재

계층상승 기회 열려있다 태도

계층상승 기회 열려있다 태도

인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의 절차문제, 대규모 채용 비리, 스스로 정한 청문회 적격기준을 무시한 장관 임명, 성범죄 때문에 치르는 보궐선거에는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맹세를 저버린 서울과 부산시장 선거, 토지주택공사 직원과 청와대 직원의 토지투기, 권력 비리에 대한 검찰수사 지연 등이 쉬지 않고 등장했고 조국사태는 불을 끼얹었다.

불공정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 곁에 있다. 학교 성적평가, 입시·취직·결혼·승진 등 인생의 고비마다 불공정이 발목을 잡을 수가 있다. 노력의 크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 것이 공정이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우수한 성적표를 받고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며, 성실히 근무하면 승진하고 성공하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다. 공정은 경쟁의 규칙이 지켜질 때 담보되고 위반자를 경쟁에서 탈락시키는 신상필벌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 소박한 기준을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우선 경쟁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기 때문에 경쟁을 제한하고 축소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견해가 있다. 교육이 그 예다. 한국의 진보좌파는 학교는 경쟁의 무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성적과 스펙 경쟁은 본인의 노력보다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결과를 좌우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 사회에서의 지위까지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계급사회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오직 자신 능력만으로 성공은 불가능

수저 계급론은 마이클 샌델의 저서『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샌델은 성적 경쟁의 승리자들이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했다는 자만과 오만에 빠져서 패배자들을 멸시하며, 반면에 패배자들은 자기 일에 대한 자존감을 상실하고 모멸감 속에서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엘리트 계층에 대한 분노를 이용한 포퓰리즘으로 대선 승리를 움켜쥔 데서 알 수 있듯이 능력주의는 미국을 두 쪽으로 갈라놓고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는 해석까지 곁들였다.

2020년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입학생의 55%가 소득 상위 20%에 속하는 가정 출신이었다. 출발선이 다른데 경쟁을 공정하게 한다고 해서 결과가 공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은 맞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을 백안시하면 공정이 확보되는가? 대학 입학을 추첨제로 하면 공정한가? 출발선이 동일하므로 표면적으로는 공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공정하다. 가난한 가정의 노력파 수험생과 부유한 부모 슬하의 게으른 수험생이 똑같이 운에 맡겨지는 처지가 되는 것은 불공정하기 짝이 없다.

학생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자고 뛰쳐나가겠지만, 그것도 잠시이고 대입준비보다도 더 치열한 취직준비를 강요당할 것이다. 취업도 추첨제로 하면 해결된다고?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와 정치가가 있다면 그 직업부터 추첨제로 하자고 나서는 것이 공정한 태도다.

부모 찬스 막고 기회 확대해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능력주의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이 대표는 기회의 평등과 경쟁의 공정성이 확보된 능력주의가 공정하다고 주장했지만, 진 교수는 능력주의가 경쟁만능주의를 낳고 공동체 연대를 훼손하며 약자를 보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 논쟁은 능력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포용함으로써 해소된다. 부모 찬스의 소지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만인의 관심사인 교육기회의 문을 넓히기 위해서 장학금제도가 있고 지역균형선발제도도 있다. 이러한 제도를 확대하고 내실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가난한 인재들을 찾아내서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도 지원함으로써 알바 걱정 없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기회의 평등은 불가능한 신기루다. 재벌 자녀와 서민 자녀의 기회를 평등하게 할 수 있겠는가? 재벌 해체하고 재산 몰수하면 된다는 단세포적 발상을 할 수는 있겠으나 소탐대실이다. 현실적 대안은 재벌 회장을 CEO 경쟁 시장에서 능력주의에 근거해 선택하는 것이다. 고 이건희 회장의 유가족들이 11조원의 상속세를 물게 되었는데 경영권 안정을 해치기 때문에 과중하다는 비판이 있지만, 공정사회를 위해서는 상속증여세가 필요하다.

차별은 기회 평등 말살하는 적

능력주의는 정실주의가 낳는 불공정을 시정하는 유효한 장치다. 능력주의를 배제할 것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진작해서 능력주의가 잘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절대적인 기회 평등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최대한 모든 국민에게 기회가 골고루 열리도록 해야 한다. 학벌·성별·지역 등에 따른 차별은 기회 평등을 말살하는 적이다. 여성할당제에 대한 논란도 빈번한데 여성 차별적인 인습과 관행을 깨는 것이 해결의 정도이며 할당제는 차별이 없어질 때까지 과도기적으로 필요하다.

우리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차별의식이 불공정을 낳는다. 대졸은 고졸보다 우월하고, 명문대는 선택받았고,임대아파트 주민은 패배자이고, 비정규직은 열등하다는 공동체 파괴적 편견과 오만을 버려야 한다. 성공의 절반은 노력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부모운, 시대운, 선후배운이라는 세상 이치 앞에서 겸손해지면 좋겠다.

기회 평등 위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공정사회로 가는 길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정책적·제도적 확립이 어우러지면 공정이 공허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국민이 체감하는 가치로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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