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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문어다리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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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디렉터

이후남 문화디렉터

종로3가 큰길에서 극장 앞 골목으로 접어들면, 줄지어 늘어선 노점상 손수레가 각종 간식거리를 팔고 있었다. 그 중에도 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문어 다리였다. SF영화의 외계인이 떠오를 정도로 엄청나게 크고 굵었다. 다리 주인이 문어가 아니라 열대 바다에 사는 오징어란 말도 있었지만, 익숙한 동해안 오징어와는 몸집부터 달랐다.

문어 다리가 생각난 것은 서울극장이 다음 달 말이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한때는 일주일에 두세번씩 갔던 곳이다. 신작 영화의 언론·배급 시사회가 가장 많이 열리는 극장이었기 때문이다. 굵직한 한국영화 시사회 때면 극장 앞 작은 광장은 영화계 사람들로 한껏 북적였다. 골목의 문어 다리부터 광장의 인파까지, 마치 한장의 파노라마 사진처럼 떠오른다.

42년 역사의 서울극장. 이달 초 모습이다. 8월 말로 영업을 종료한다. [뉴스1]

42년 역사의 서울극장. 이달 초 모습이다. 8월 말로 영업을 종료한다. [뉴스1]

서울극장을 비롯해 수십 년씩 각 지역을 대표하던 극장들의 쇠퇴는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의 확대와 맞물린다. 시사회 단골 극장도 그런 멀티플렉스 지점 몇 곳으로 바뀐 지 오래다. 극장 먹거리도 상대적으로 표준화됐다. 요즘 관객들은 노점상 간식보다 멀티플렉스마다 조금씩 다른 맛과 향을 내세우는 팝콘 세트 같은 것이 훨씬 친근할 터. 물론 지금은 그조차 맛보기 힘들다. 방역지침에 따라 영화관·공연장 등은 취식 금지 구역이 됐다. 뜻하지 않게 영화에만 집중해야 하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사람에 따라 호오가 갈리지만 극장 먹거리는 역사가 꽤 오래다. 1920~30년대 변사의 해설과 함께 무성영화를 보여주던 극장에는 관객 사이를 다니며 과자 같은 것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국 극장도 일찌감치 사탕 같은 것을 팔았다는데, 팝콘을 팔기 시작한 것은 30년대로 알려져 있다. 음식문화연구자 앤드루 스미스의 관련 저서에 따르면, 카펫을 더럽힐까 봐 음료나 먹거리에 질색하던 극장들을 설득한 사업가가 큰 성공을 거둔 이후 점차 여러 극장에 팝콘 매대가 생겼다. 특히 대공황기를 거치며 팝콘은 관객에게는 ‘저렴한 사치품’으로, 극장 측에는 높은 마진율의 효자 상품으로도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영화관에서 ‘먹는 것’과 ‘보는 것’ 중 하나를 고르라면 물론 정답은 후자다. 한데 영화관람이라는 체험을 돌이키자면 스크린의 시각적·청각적 자극을 넘어서는 오감이 종종 동원된다. 제천 국제 음악영화제 개막작을 청풍호반에서 야외상영으로 본 적이 있다. 나처럼 외지에서 온 사람과 달리 동네 주민인듯한 관객들은 준비가 살뜰했다. 임시로 설치된 딱딱한 의자에 놓고 앉을 방석에, 영화를 보며 먹을 찐 옥수수까지 넉넉히 챙겨왔다. 그 틈에서 영화에 집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기우였다. 편안하게 터져 나온 웃음과 호응이 어우러진 여름밤의 분위기는 이날 본 음악영화 ‘원스’의 멜로디처럼 두고두고 기억에서 재생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