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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전사' 상징된 호랑이…조선 때는 대규모 소탕 작전에 국력 총동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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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도쿄 하루미 지역 올림픽선수촌 대한민국 선수단 숙소에 '범 내려온다'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펼쳐져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S

17일 도쿄 하루미 지역 올림픽선수촌 대한민국 선수단 숙소에 '범 내려온다'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펼쳐져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S

포효하는 호랑이와 '범 내려온다'는 글씨. 17일 일본 도쿄 올림픽선수촌 대한민국 선수단 숙소에 걸린 새로운 응원 현수막이다.
대한체육회는 14일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적힌 응원 현수막을 설치했다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말이 연상된다는 지적을 받고 철거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올림픽헌장은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표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새 현수막은 지난해 국악 밴드 이날치가 발표해 큰 인기를 끈 노래 '범 내려온다'와 1908년 최남선이 한반도를 호랑이로 형상화한 그림을 섞어 내놓은 것이다. 문화계의 한 인사는 "호랑이는 한반도의 기상을 상징하고, 일본이 멸종시킨 동물이니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과 호랑이의 악연
1917년 11월 일본의 사업가 야마모토 타다사부로는 30여명의 포수로 구성된 정호군(征虎軍)을 이끌어 당시 큰 화제가 됐다. 그는 1917년 11월 12일 부터 동년 12월 3일까지 한반도를 누비며 호랑이 사냥을 다녔다. 이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 ‘대호’도 2015년 나와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당시 일본의 무분별한 포획이 한반도 호랑이의 씨를 말렸다는 여론의 공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호랑이를 무차별 포획했다. [중앙포토]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호랑이를 무차별 포획했다. [중앙포토]

일본이 호랑이에 집착한 것은 유래가 깊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에서 호피(虎皮)를 요청했다는 기사가 수차례 등장한다.
“일본국 비전(肥前ㆍ히젠)의 승려 길견창청(吉見昌淸)이 사람을 보내어 칼 6자루를 바치고 베와 호피(虎皮) 등의 물건을 요구하므로, 모시와 삼베 각각 5필과 호피 5장을 하사하였다.”(『세종실록』 즉위년 10월 29일)
일본 열도에 없는 호랑이는 진귀한 영물로 인식됐다. 임진왜란의 2군 선봉장을 맡았던 가토 기요마사도 자신의 무용을 선전하기 위해 호랑이 사냥을 이용했고, 이는 각종 이야기나 판화로도 남겨졌다. 20세기 초 조선을 지배한 일본의 호랑이 사냥은 빈번해졌다.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마지막으로 잡힌 것은 1924년이다. 일본의 호랑이 사냥이 호랑이 멸종에 결정타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본의 사냥이 없었다면 한반도에는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을까. 전문가들은 다소 회의적이다. 호랑이 입장에서 본다면 가혹하기는 조선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타이거밸리의 호랑이. 김성룡 기자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타이거밸리의 호랑이. 김성룡 기자

조선 초 농지 개간, 인간과 호랑이의 갈등 
”범을 잡으소서… 만일 동왜(東倭)와 북적(北狄)이 우리 경계를 침범하여 노약(老弱) 2, 3구(口)를 노략질하여도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국위를 보이는데, 하물며 이러한 악한 범이 인물을 상해하여 그침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옛적에 주공(周公)이 호표 서상(虎豹犀象)을 몰아낸 것은 백성의 해로움을 제거한 것입니다.“ (『성종실록』5년 윤6월 25일)
성종 때 올라온 이 상소는 성리학의 이상적 지도자인 주공을 본받아 호랑이 등 맹수 척결에 적극 나서라는 호소를 담고 있다. 이처럼 호랑이 사냥을 촉구한 데는 조선의 사정이 있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적극적인 개간을 추진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아 상업을 억누르고 농업을 장려하기도 했고, 고려를 무너뜨린 명분이 토지개혁이었기 때문에 농지 확보는 절실한 과제였다. 대대적인 개간 사업 결과 조선의 경작지는 건국 직전 79만8000결에서 171만결(조선 세종)까지 2배 가까이 늘었다. 평안도는 태종 때 경작 면적이 6648결에 불과했는데 17세기엔 15만결이 됐을 정도로 폭발적인 개간이 진행됐다.

하지만 야생동물의 입장에서는 거주 공간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특히 호랑이는 초목이 무성하고 물가가 가까운 낮은 구릉지대에 즐겨 살았는데, 이곳은 농토로 개간하기에 좋은 땅이었다. 생활 공간을 빼앗긴 호랑이는 자주 인가로 출몰했고, 조선 태종 때는 궁궐에 호랑이가 뛰어들 정도로 호환이 잦아졌다. 결국 조선은 대대적인 호랑이 소탕에 나섰다.

모내기를 하는 조선 시대 농촌의 풍경.  [사진제공=우상조 인턴기자]

모내기를 하는 조선 시대 농촌의 풍경. [사진제공=우상조 인턴기자]

호랑이 사냥은 조직적으로 추진됐다. 조선은 전국 군현에 매년 호랑이를 잡아 그 가죽을 진상하도록 했고,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호랑이 사냥 전문 부대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편성했다. 이들은 조선의 정예 병력인 갑사(甲士) 중에서도 최정예로 꼽혔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착호갑사 440명을 포함해 각 주(州)·부(府)·군(郡)·현(縣)에서 20~50인의 착호인(捉虎人)을 선발해 운영했는데 총 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은 호랑이 사냥의 대가로 세금을 면제받았다. 호랑이 전문 연구가인 김동진 전 교원대 교수는 전국 330여개 군현에서 매년 호랑이를 440~740마리 가량 잡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백성의 짐이 된 호랑이 사냥
하지만 백성을 위한다며 시작된 호랑이 사냥은 도리어 백성을 괴롭히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각 고을은 매년 일정량의 호피를 중앙 정부에 바쳐야 했지만, 호랑이는 쉽사리 잡히는 동물도 아니었고, 활동반경도 넓었다. 또 농지 개발로 호랑이가 사는 공간이 줄어들면서 호랑이 사냥은 각 지역의 골칫거리가 됐다. 인조 11년(1633년) 전라도 무안현감이던 신즙은 『하음집(河陰集)』을 통해 “매년 겨울 석 달 동안 잡은 게 겨우 1~2마리”라고 하소연했을 정도다.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1745~1821)의 ‘수렵도(狩獵圖)'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1745~1821)의 ‘수렵도(狩獵圖)'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지방 수령 입장에서는 호랑이 가죽을 반드시 구해야 했기 때문에 결국 다른 고장에서 구입해 정부에 바치는 대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호피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성종 때 무명 30여필이던 호피 가격은 연산군 때 80필로 올랐고, 명종 때가 되면 350~400필까지 치솟았다. 이는 고스란히 백성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또 호랑이를 잡으면 지방 수령들에게 포상을 내린 것도 오히려 '독'이 됐다. 지방 수령들이 치안 유지보다 되려 호랑이 사냥에 혈안이 된 것이다.
”수령이 1년에 호랑이 10마리 이상을 잡으면 계급을 더하는데, 도둑을 잡는 것은 논상하는 법이 없습니다…청컨대 도적을 잡으면 논상하는 법을 세워서 권면하게 하소서“(『성종실록』20년 3월 15일)

'하늘의 별따기'가 된 호랑이 사냥
조선 후기 개간 사업이 마무리 되면서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호랑이가 살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사라졌다. 『영조실록』의 다음 내용은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백성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무슨 호랑이가 있다고 호랑이 값을 거두어 들이는가?’ 하고 있으니…만약 경감해 주고자 한다면 호속목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광좌)
“백성을 위해 해를 없애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나, 호랑이를 잡기가 쉽지 않고, 다만 쌀과 베만을 징수하고 있으니 그 해가 도리어 호랑이보다 더 심하다”(영조)

호랑이 사냥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그만큼의 가격에 해당하는 쌀이나 무명을 내도록 하는 호속목(虎贖木)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고스란히 지역 백성들의 짐이 됐으니 원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조는 이광좌의 제안을 받아들여 호속목을 철폐했다. 김동진 전 교원대 교수는 『조선의 생태환경사』에서 "이는 하반도에서 호랑이와 표범의 개체 수가 극적으로 줄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지적했다.

'맹호도' [중앙포토]

'맹호도' [중앙포토]

환경도 호랑이에게 점점 가혹해졌다. 17세기엔 전세계적 소빙기(小氷期) 현상이 일어나면서 온도가 내려갔고 땔감을 구하기 위한 벌목이 활발해져 전국 곳곳의 산림이 민둥산으로 변했다. 호랑이의 공간이 더욱 좁아진 것이다. 또 대규모 우역(牛疫)이 만연하면서 사슴과 멧돼지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타격이 됐다. 먹이가 사라진 호랑이들은 인가로 내려오다가 많은 수가 사살됐다.

1917년 30여명의 엘리트 포수들이 합류하고 국가적 지원을 받은 야마모토 정호군이 잡은 호랑이는 2마리였다. 이 사실은 이미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보기가 매우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천덕꾸러기'였던 호랑이가 나라에서 보호하고 민족을 상징하는 동물로 대우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민족의식이 강화하고 '자연 보전'에 대한 개념이 심어진 근대 이후의 일이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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