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 높은 명문 오케스트라의 두 리더, 평창서 만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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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매년 여름, 강원도 평창은 외국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집결지가 된다. 2018년부터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수석 조인혁(클라리넷), 독일 뒤셀도르프 심포니 수석 김두민(첼로), 핀란드 방송교향악단 수석 함경(오보에) 등 유럽·미국·아시아의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한국 단원들도 합류한다. 평창대관령음악제의 개·폐막을 장식하는 ‘평창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연주를 통해서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3년 전 예술감독을 맡으면서 만들었다. 첫해 차이콥스키 교향곡에서 완성도 높은 연주를 들려준 후 이 오케스트라는 음악제의 대표 상품이 됐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이지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박지윤 #월말 개막 평창대관령음악제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악장 맡아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에서 지휘자 주빈 메타와 함께한 제2바이올린 악장 이지혜(가운데) [사진 이지혜]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에서 지휘자 주빈 메타와 함께한 제2바이올린 악장 이지혜(가운데) [사진 이지혜]

평창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악장은 둘.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36)·박지윤(36)이다.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은 현악기뿐 아니라 관악기와 타악기군 전체를 이끄는, 단원들의 리더다. 영어로는 공연의 책임자인 ‘콘서트 마스터(concert master)’로 불린다. 이지혜와 박지윤은 2019년부터 평창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번갈아 맡고 있으며, 올해도 개막과 폐막을 나눠서 담당한다.

두 연주자는 유럽의 명문 오케스트라에서 ‘최초 동양인 여성’으로 악장을 맡고 있다. 이지혜는 독일 뮌헨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에서 제2 바이올린 악장, 박지윤은 파리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악장이다. 각각 2015년, 2018년 종신 악장으로 임명됐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제2바이올린의 리더에게도 ‘악장(Konzertmeisterin)’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두 오케스트라 모두 유럽에서 손꼽히는 좋은 악단이고, 매년 세계 곳곳에서 초청을 받는 곳이다. 자존심도 높은 유럽의 악단에서 리더 역할까지 해내는 두 연주자는 “오래된 전통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처음 듣는 순간 운명으로 느꼈다”며 “함께 하는 희열을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각각 전화로 진행했다.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의 박지윤 악장. [사진 크리스토프 아브라모비츠]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의 박지윤 악장. [사진 크리스토프 아브라모비츠]

이지혜와 박지윤 모두 화려한 경력을 쌓았던 독주자였다. 이지혜는 2011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3위에 올랐고, 박지윤은 18세에 티보 바르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지혜는 “좋은 연주를 위해 노력하고, 경쟁해서 이겼지만 그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 모르던 차에 오케스트라 경험을 쌓게 됐다”고 했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학생 프로그램인 아카데미에 2012년 들어가 제2 바이올린 맨 끝자리에 앉았다. “슈베르트 미사를 연주하는데 귀에 돌비 사운드가 들어간 듯 전율이 왔다. 살면서 처음 느껴본 충격이었다.” 그는 “이거 해봐야겠다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기억했다. 2014년 제2 바이올린 악장 오디션에 응시해 6개월 동안 연주하고 최종 단원 투표에서 80% 이상 찬성을 얻어 임명됐다.

박지윤 또한 “혼자 악기에 빠져서 살다가 오케스트라를 처음 경험했을 때 즐거움이 컸다”고 했다. “연습과 연주를 할 때마다 오케스트라 소리에 행복하다. 직업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혼자만 잘해서는 안 되고, 단원들을 이끌기까지 해야 하는 역할이다. 박지윤은 “연주가 있으면 한 달 전에 모든 현악기의 활 쓰는 방법을 정해 악보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지휘자와 단원의 연결도 이들의 몫이다. “지휘자가 원하는 걸 확실히 받아서 단원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특히 지시가 명확하지 않은 지휘자의 경우엔 악장의 역할이 더 크다.”

단원을 리드하기 위해 몸동작도 크게 해야 한다. 이지혜는 “그룹의 맨 앞에 앉기 때문에 명확한 제스처를 해야 단원들도 일치된 소리를 낼 수 있다”며 “단원들보다 작기 때문에 의자를 끝까지 올리고 앉는다. 발이 바닥에 안 닿는다”며 웃었다. 명문 악단을 찾아오는 정상급 지휘자, 협연자들과 함께 연주하는 경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리카르도 무티,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주빈 메타처럼 감히 곁에 갈 수도 없던 지휘자들과 함께 연주해 매번 떨린다.”(이지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2023년부터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음악감독을 맡는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16년을 보낸 명지휘자다. 이지혜는 “래틀은 매 시즌 함께 연주했었는데, 배울 점이 많아 악보에 그의 유머까지 받아적을 정도”라 했다.

뮌헨과 파리의 오케스트라는 이들의 평생직장이다. 두 악장은 “인간관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곧 좋은 악장은 아니다. “연주만 하는 게 아니라 회의도 하고, 내 목소리를 내거나 남을 도와줘야 할 일도 생긴다. 사람들과 잘 지내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이지혜)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은퇴할 때까지 가족처럼 같이 지내야 한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기는 연주자라야 오케스트라에서 생활할 수 있다.”(박지윤)

이들은 평창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한국 음악계의 미래를 보여준다고 했다. 이지혜는 “지금 독일의 많은 오케스트라가 새 단원들을 뽑고 있다. 더 많은 한국 연주자가 좋은 악단에 포진할 것”이라고 했다. 두 바이올리니스트는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의 알펜시아 뮤직텐트에서 이달 28·31일, 다음 달 7일 오케스트라를 이끈다. 앞의 두 번은 이지혜, 마지막 공연은 박지윤이 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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