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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9 09:31:28

[더오래]변화무쌍한 제주 날씨, 골탕먹을수록 정든다

중앙일보

입력 2021.07.18 11:00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97)

마라도는 건물도 많지 않고 지형이 평평해 비와 바람이 심한 날이면 여유롭게 경관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 이웃한 가파도 역시 그렇다. [사진 박헌정]

마라도는 건물도 많지 않고 지형이 평평해 비와 바람이 심한 날이면 여유롭게 경관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 이웃한 가파도 역시 그렇다. [사진 박헌정]

월요일 오전이다. 모처럼 일정이 비는 한 주, 지루하고 심심한 일상이 될까봐 덜컥 겁이 났다. 그건 아주 끔찍한 일이다. 탈출하자! “여보, 잠깐 제주도에 다녀올게.” 달랑 배낭 하나 메고 가까운 군산공항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올레길을 걷기 위해 숙소를 나서는데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러면 걷는 게 즐겁지 않은데….’ 잠시 고민하다 마라도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국토 최남단 방문,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 같았다.

버스로 모슬포 운진항까지 이동했다. 여러 노선 가운데 하필 가장 멀리 도는 노선이라 도착 즈음에는 오줌보가 터질 지경이다. 더 큰 문제는 굵어진 빗줄기다.

오전 11시 10분 배로 들어가 여유 있게 돌아보고 오후 2시 30분 배로 나오려고 했지만, 날씨 때문에 나오는 배가 결항할 수 있으니 1시 배로 나오라고 한다. 섬은 한 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본단다. 그 앞에서 “그럼 짜장면은요?”하고 묻기 창피해 머릿속으로 섬에서 시간 배분을 어떻게 할지 궁리했다.

- 1안 : 최남단 국토를 가슴 벅차게 둘러보고 짜장면은 포기한다.

- 2안 : 짜장면을 맛있게 먹고 섬은 잠깐 둘러본다.

- 3안 : 자전거를 빌려준다고 하니, 가방 맡기고 자전거로 재빨리 둘러본 후 짜장면을 먹는다.

'짜장면 시키신 분' 광고이후 유명세를 탄 ‘마라도 짜장면’. 경험담을 통해 '마라도=짜장면' 이미지는 계속 강화된다. 주민들은 스토리텔링을 선물 받은 것 같다.

'짜장면 시키신 분' 광고이후 유명세를 탄 ‘마라도 짜장면’. 경험담을 통해 '마라도=짜장면' 이미지는 계속 강화된다. 주민들은 스토리텔링을 선물 받은 것 같다.

짜장면에 집착하는 이유? 오래전 통신사 광고에서 철가방 든 사람이 “짜장면 시키신 분!”을 외치면서부터 ‘마라도=짜장면’이 되지 않았던가.

위아래로 심하게 요동치던 배가 섬에 도착하자, 날씨는 더 가혹해졌다. 비 때문인지 자전거 빌려주는 사람은 없고, 비바람을 피할 곳도 없다. 한 손에는 우산, 다른 손에는 카메라…. 우산은 바람에 뒤집히고 일회용 비옷은 막아주는 비보다 더 많은 땀을 쏟게 한다.

마라도는 여의도의 10분의 1 크기, 섬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60명 정도가 함께 왔는데 섬을 둘러보는 사람은 열 명 남짓이다. 섬이 가진 중요한 의미에 비해 대단한 절경은 없는 듯하다. 흐린 바다를 보며 걷다 보니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 절, 화물선 선착장이 나오고 이어 커다란 ‘대한민국 최남단’ 표지석이 보인다. 그 앞에서 셀카를 찍으려고 애쓰는 노부부에게 달려가 사진 찍어주고 내 것도 부탁했다. 성당도 있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 들어가 다소곳이 무릎 꿇고 기도드리고 봉헌도 했다.

일기예보에서 “제주는 영상 10도”라고 하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었다가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기온이라도 바람이 심해 춥고 힘들 때가 많다.

일기예보에서 “제주는 영상 10도”라고 하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었다가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기온이라도 바람이 심해 춥고 힘들 때가 많다.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자 시간이 남아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다. 섬에는 짜장면집이 아주 많다. 맛은 평범하지만, 짜장 위 고명으로 나온 톳의 식감이 특별하고 재미있다. 이것저것 다 해도 70분 정도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섬이다. 오늘 같은 날은 어디 들어가서 해녀가 건져 올린 해물에 낮술이라도 한잔하지 않는다면 비 피할 곳도 없을 테니, 매표소의 말씨 곱던 젊은 여자 직원은 그런 것까지 생각해 안내해준 것 같다.

국토 최남단에 와본 기분으로 들뜰 만도 한데 거센 비바람에 온몸이 젖자 마음마저 주눅 든다. 문득, ‘난 불과 한 시간 머물렀지. 독도를 지키는 젊은이들은 늘 이럴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제주도를 너무 좋아해 지금껏 50번도 넘게 와봤지만 오면 올수록 쉽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여름에는 너무 뜨겁다. 겨울에는 따뜻할 것 같지만 천만에, 몸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몹시 냉랭하고 으슬으슬하다. 그러니 제주는 뭍사람의 환상으로만 채워진 낙원의 땅이 아니다.

환상과 현실의 틈을 여실히 느낀 것은 몇 년 전 2월 여행 때였다. 영상 18도까지 올라간다는 기상예보에, 벌써 봄을 맞은 듯이 오름에서 맞이하는 물기 많고 자애롭고 달콤한 바람을 기대하며 설렜다. 게다가 2인 왕복 항공요금이 6만7000원!

그런데 그 계절에 특가 항공권이 나오는 이유가 있었다. 비행기는 제주 상공에서 가랑잎처럼 십분 이상 상하좌우로 흔들리다가 사람들이 지칠 때쯤 착륙했는데 공항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돌풍 때문에 이후 60여 편이 전부 결항이었다.

다음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올레 5코스를 걸었다. 처음에는 날이 따뜻하고 바람이 없어 괜찮다가 발가락 사이로 점점 물이 질컥거리더니 위미리 동백군락지를 지날 때쯤에는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치 제주 용천수처럼 트래킹화 발등으로 물이 찍찍 뿜어져 나왔다.

몇 년 전 2월 제주여행 때는 ‘영상 18도’를 기대하며 갔다가 돌풍, 비, 바람, 폭설을 다 겪고 기진맥진해 돌아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다.

몇 년 전 2월 제주여행 때는 ‘영상 18도’를 기대하며 갔다가 돌풍, 비, 바람, 폭설을 다 겪고 기진맥진해 돌아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다.

그러다 비가 휘몰아쳤다. 비가 안 왔으면 좋았을까? 천만에. 그다음 날에는 비 대신 바람이 거셌다. 그동안 느껴본 포근하고 감미로운 바람이 아니다. 너덧 시간 동안 사나운 바람을 얼굴로 받아내다 보니 차라리 비가 나을 것 같았다. ‘영상 18도’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 몸이 느끼는 건 달랐다. 결국 김녕에서 광풍과 호우를 만나 택시를 불렀다.

변화무쌍한 날씨는 돌아오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새벽에 눈이 오길래 성산읍의 콘도를 일찌감치 나섰는데 눈발이 갑자기 굵어져 시야가 막혔고, 눈 덮인 도로를 시속 20~30km로 기어가 겨우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약간만 경사가 있어도 바퀴가 스키처럼 줄줄 미끄러지니 길옆 나무를 들이박거나 낮은 곳으로 굴러떨어질까 봐 겁났다. 머릿속에 막연히 맴돌던 제주 이주의 꿈은 이때 싹 달아났다.

지친 도시인에게 제주는 평화와 휴식의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겐 생생한 삶의 터전이다. 제주를 자주 찾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그 속살을 들여다보게 된다.

지친 도시인에게 제주는 평화와 휴식의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겐 생생한 삶의 터전이다. 제주를 자주 찾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그 속살을 들여다보게 된다.

30여 년 전 처음 제주를 찾았을 때는 민속 마을이나 폭포 같은 자연경관을 보며 신기해했고, 가장이 되어 가족들과 휴가여행을 갔을 때는 박물관이나 테마공원 같은 곳을 찾아다니며 즐거워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마음이 힘들 때, 혼자 올레길과 오름을 다니며 나를 마주하고 다독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몰리지 않는 계절에는 항공권도 저렴하고 호젓해 좋았지만 반대로 온갖 기상 변수를 감내해야 했다. 그러니 며칠 여행하고 나면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그렇지만 날씨가 늘 맑고 쾌적하기만 했다면 치유의 힘은 반감되었을 것 같다.

제주는 주민들에겐 현실 속 삶의 터전이고 외지인에겐 그리운 휴식의 세계다. 환상이 아닌 현실 속의 제주는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고, 아플 정도로 얼굴을 때리는 거친 비바람을 통해 나는 점점 그 제주를 알아간다. 고생할수록 제주와 더 끈끈해지고 정이 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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