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풀 먹는 게 비건이 아녜요”…환경에 꽂힌 250만 ‘유연한 채식생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순간, 장인의 억센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아내가 뺨을 감싸 쥐었다. …(중략)…
“한번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 고기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한강『채식주의자』중)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Vegetarian)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묘사돼 왔다. 그중에서도 육류와 생선은 물론 우유·계란·꿀 등 동물에서 나오는 식품을 일절 거부하는 ‘비건(Vegan)’은 단체 생활에 부적합한 까다로운 소수자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넓고 유연하게 쓰이는 ‘요즘 비건’

채식의 단골 메뉴인 샐러드를 먹는 모습. 중앙포토

채식의 단골 메뉴인 샐러드를 먹는 모습. 중앙포토

하지만 최근 비건이 일반 대중 사이에서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비건의 목적이 동물과 환경을 보호한다는 보편적 가치로 넓어지고, 일상에서 이를 조금이라도 실천하는 경우 비건이란 이름을 붙인다. 심적 거리감이 줄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고 관련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제 비건은 ‘베지테리언’을 대신하는 유행어가 됐다.

직장인 엄예지(35·서울 잠실)씨는 자칭 비건이다. 소·돼지 등 가축을 키우는 일이 엄청난 탄소를 발생시켜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채식을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고기를 아예 안 먹는 건 아니다. 그는 “주말엔 고기를 먹지 않는다거나, 우유 대신 아몬드 우유를 마시는 식으로 채식을 늘리고 있다”며 “크게 힘들지 않으면서 여드름도 덜 나는 것 같고 환경에도 도움이 되니 여러 가지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국내 채식인구 15만→250만명 

엄 씨처럼 유연하게 채식을 하는 ‘플렉시테리언(flexible+vegetarian)’ 들이 많아지면서 채식 인구도 빠르게 늘고 있다. 18일 한국채식연합에 따르면 국내 채식 인구는 2008년 15만명에서 2018년 150만명으로 10년 만에 10배가 늘었다. 지난해 200만명에서 올해는 250만명으로 추정돼 증가세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빠르게 증가하는 한국의 채식인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빠르게 증가하는 한국의 채식인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엄격하든 느슨하든 채식이 하나의 트렌드가 된 이유는 크게 건강·동물보호·환경 등 3가지다. 이 중 채식이 육식보다 건강에 좋은지는 의학적으로 논쟁이 많은 부분이다. 하지만 동물보호와 환경 이슈는 상대적으로 공감대가 이뤄져 있다. 50대 중반인 강모씨는 딸의 성화에 강아지를 기르면서 채식을 하게 된 사례다. “원래 개고기도 먹었다”는 그는 “강아지와 가족처럼 지낸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굳이 대량으로 키워 도축되는 고기를 먹어야 하나 싶어 어쩔 수 없는 자리가 아니면 붉은 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환경에 부담주는 대량축산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말 반려동물 가구는 604만 가구로 국내 전체 가구의 약 30%에 해당하며 인구로는 1500만명에 육박한다. 이 중엔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펫팸족(pet fam)’도 많아 비윤리적인 사육·도축 시스템에 거부감을 느끼며 채식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또 동물복지 차원에서 화장품 제조 과정에서 이뤄지는 동물실험, 옷이나 가방에 동물 가죽 사용을 반대하기도 한다.

환경 문제는 세계적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트렌드와 맞물려 채식 인구 증가의 가장 두드러진 배경이 되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이 운영하는 통계사이트(OWID)에 따르면 농·축산업은 인간이 발생시키는 이산화질소의 81%, 메탄의 44%, 이산화탄소의 13%를 차지하는데, 이 중 대부분은 소와 양의 사육 때문이다. 단백질 1g을 얻기 위해 발생하는 온실가스, 필요한 땅과 물의 양도 소와 양, 돼지가 월등히 높다.

젊은층 96% “환경위해 식습관 바꾼다” 

환경오염 문제에 가장 민감한 건 20·30대가 주축인 MZ세대(밀레니얼·Z세대)다. MZ세대 전문 연구기관인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지난 4월 MZ세대 9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5.6%가 환경을 위해 음식·식사와 관련한 습관을 바꾼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또 3명 중 1명(27.4%)이 채식과 육식을 병행하는 간헐적 채식을 실천하고 있었다.
채식을 실천하는 방법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고기를 안 먹으려고 노력한다’ ‘SNS에서 본 핫한 비건 식당에 가봤다’ ‘고기 먹은 날엔 간식이라도 채식으로 챙겨 먹는다’ 등으로 다양했다. 엄격하고 금욕적인 식단 제한 대신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실천하는 셈이다.

서울 신촌에서 헤어 디자이너로 일하는 조이아(34)씨는 “처음엔 고객의 헤어와 두피 건강을 위해 식물성 아로마 제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가 환경 분야로 시각이 넓어지면서 결국 내 생활 속 모든 것들이 비건과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과도한 육식 등 먹는 것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자 감정과 기분을 다스릴 수 있게 됐고, 쓰레기 하나를 버릴 때도 함께 사는 환경을 위해 더 꼼꼼히 분리 배출하는 등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커졌다고 했다.  그 역시 허기가 질 땐 계란이나 버터, 우유 정도는 먹는다. 조 씨는 “환경·사회와 내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받는다는 점이 비건 라이프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빠르게 증가하는 비건 먹거리

마켓컬리 비건상품 매출 증가율.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마켓컬리 비건상품 매출 증가율.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비건 라이프’의 대중화는 시장의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대표적인 장보기앱인 마켓컬리가 최근 3년 비건 관련 상품의 매출을 분석해 보니 2018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반기마다 평균 57%씩 증가하며 빠른 성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콩고기와 야채를 섞어 만은 라구소스(왼쪽)와 콩으로 만든 마요네즈. 사진 마켓컬리

콩고기와 야채를 섞어 만은 라구소스(왼쪽)와 콩으로 만든 마요네즈. 사진 마켓컬리

품목도 샐러드뿐 아니라 아몬드·귀리우유 등 비건 음료, 콩으로 만든 라구 소스나 식물성 마요네즈 같은 비건 소스, 비건 디저트 등으로 다양해지는 추세다. 특히 올 상반기에는 고기 대신 고기의 맛을 내는 다양한 대체육 상품이 확산하면서 비건 간편식이 전체 비건 상품 판매량의 14%를 차지했다.

고기의 맛과 질감을 재현한 식물성 대체육(왼쪽)과 비건용 김밥. 사진 마켓컬리

고기의 맛과 질감을 재현한 식물성 대체육(왼쪽)과 비건용 김밥. 사진 마켓컬리

이와 관련 식품기업 SPC삼립은 지난 3월 미국의 식품 기업인 ‘저스트’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기도 했다. 저스트는 녹두 단백질로 계란 맛을 구현한 ‘저스트 에그’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는데, SPC삼립은 올 하반기 관련 상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이 기업이 운영하는 샐러드 전문 식당 ‘피그인더가든’의 올 상반기 매출도 1년 전보다 172%나 증가했다.

채소와 과일, 빵 등이 주를 이루는 다양한 샐러드 메뉴. 사진 SPC그룹

채소와 과일, 빵 등이 주를 이루는 다양한 샐러드 메뉴. 사진 SPC그룹

‘개념소비’ 브랜드 된 비건라이프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코로나를 계기로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는데 특히 MZ세대는 친환경·윤리 소비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세대”라며 “예전에 비건이 독특하거나 극단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분류됐다면, 지금은 ‘나도 개념소비. 윤리소비에 동참하고 있다’는 소속감을 표방하는 일종의 브랜드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비건 트렌드가 먹거리는 물론 소비자 산업 전반으로 퍼지면서 지속가능성과 친환경 가치를 드러내는 브랜드가 선택받는 현상이 점점 더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