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재판개입' 노이로제…한일관계 추락 '1000일 동안' [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2021.07.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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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한·일관계 추락의 시작, 2018년 10월 30일 

1주일 뒤인 오는 25일이면 대법원이 일본 전범 기업들을 상대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2018년 10월 30일)한 지 꼭 1000일째가 된다. 도쿄 올림픽이라는 경사를 계기로도 쉽게 정상회담에 합의하지 못하는 지금의 한ㆍ일 관계 급전직하는 사실상 강제징용 판결이 시발점이었다.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이 2018년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 선고를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이 2018년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 선고를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과거사에 묶여 한발도 움직이지 못한 1000일의 기록을 살펴봤다.

징용 소송 청구 18년만에 터진 '대형폭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 기업들을 상대로 국내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건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ㆍ2심은 “1965년 맺은 한ㆍ일 협정으로 피해자 개인의 배상 청구권은 소멸했다”며 기각했다.

하지만 2012년 대법원은 “징용은 국가가 저지른 반인도범죄라 한ㆍ일 협정으로도 개인의 배상 청구권이 사라졌다고 볼 수 없다”고 이를 뒤집고 파기ㆍ환송했다. 환송심도 대법 판단에 따라 피해자 손을 들어줬고, 이번엔 피고인 전범 기업들이 재상고하며 사건은 다시 대법원으로 넘어왔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의 승소 판결 확정 뒤 소회를 밝히는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의 승소 판결 확정 뒤 소회를 밝히는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이후 한ㆍ일 관계에 미칠 파장을 우려, 박근혜 정부가 의도적으로 대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의 판결을 지연했다는 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기소된 이른바 ‘재판 거래’ 사건이다.

그리고 2018년 10월 대법원이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지으며 한ㆍ일 관계에는 대형 폭탄이 떨어졌다.

피해자 손 들었다 번복…혼란 자초 법원

그러나 지난달 7일 서울중앙지법은 원ㆍ피고만 다를뿐 사실상 성격이 같은 사건에 대해 2018년 대법원과 다른 판단을 내렸다. 한ㆍ일 청구권협정 2조에서 양국 정부 및 국민 간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규정한 것을 근거로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다며 각하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상반된 판결이 상존하게 된 건 강제징용 사건만이 아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월 8일 재판부는 원고 승소 판결을 했는데, 4월 21일 재판부는 원고만 다른 동일한 성격의 사건에서 각하 판결을 내렸다.

판결이 오락가락하면서 기존의 판결이 애초에 잘못돼 바로잡은 것인지, 반대로 제대로 된 판결에 다른 재판부가 공연히 딴지를 건 것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렵게 됐다.
아무리 각 재판부의 독립성을 존중한다고 해도 법원 스스로 혼란을 자초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희망 고문과 좌절 사이를 오가며 피해자들의 고통만 커졌다.

'재판 거래' 데인 외교부, 소극적 일관

법원 판결에 따른 뒷수습을 맡아야 하는 정부 역시 사실상 의무를 방기했다는 지적이다. 1000일을 되돌아봤을 때 일본을 상대로도, 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들을 상대로도 전혀 상황 진전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 사이 일본은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보복에 나서고, 한국은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종료 카드로 맞받았다. 미국의 압박으로 이를 다시 유예하기는 했지만, 예전에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적대적 상황이 반복됐다.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시민들이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으로 지나가고 있다. 뉴스1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시민들이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으로 지나가고 있다. 뉴스1

외교가에서는 재판 거래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탓에 외교부가 소극적 태도로 일관한 데 대한 아쉬움도 나온다. 박근혜 정부 당시 외교부는 법원의 요청에 따라 판결이 한ㆍ일 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의견서를 냈는데, 이로 인해 문재인 정부 들어 장ㆍ차관부터 국장, 심의관 등 당국자들이 줄줄이 검찰이나 법원에 불려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외교 소식통은 “이후 외교부는 과거사 관련 재판에 대한 의견 개진은 물론이고, 피해자들을 만나 설득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한 게 사실”이라며 “조금만 적극적으로 나서도 재판에 영향을 주거나 판결을 흔들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까 봐 오히려 더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법원에 회신 뒤 “의견은 아냐” 극구 부인

이는 지난 4월 21일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재판부가 각하 결정을 내린 뒤 외교부가 보인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재판부는 “(일본 정부에 손해 배상 책임을 지우는 건)외교부에 대한 사실조회 결과에 나타난 바와 같이 대한민국 외교 정책과 국익에 잠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며 판결의 근거를 댔다. 외교부가 원고 승소 판결 시 미칠 외교적 영향에 대한 입장을 제시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뉴스1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뉴스1

그런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실이 외교부에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이 무엇인지 질의하자, 외교부는 “재판부에 의견을 제시하거나 의견서를 제출한 바 없음”이라고 답해왔다.

이에 조 의원실이 질문을 바꿔 판결문에 언급된 부분의 근거가 되는 내용을 요청했다. 그제야 외교부는 “재판부가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세운)화해치유재단 잔여재산 등 관련 사실에 대한 조회서를 송부해와서, 이에 따른 사실조회 회신서를 제출했다”고 답했다.

“외교 직결 사안에 회피하기만…무책임”

‘의견서’가 아니라 ‘사실조회 회신서’를 냈다는 것인데, 이처럼 외교부는 ‘의견’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소스라치는 듯한 모양새다. 중앙일보의 추가 질의에도 외교부 당국자는 “회신서에 ‘의견’에 해당할 수 있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외교부의 답을 두고 “‘밥 먹었느냐’는 질문에 ‘안 먹었다’고 하고선 ‘빵은 먹었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말장난”이라는 비아냥이 외교가에선 나온다.

한일협정 조인서. 중앙 포토

한일협정 조인서. 중앙 포토

특히 외교 관계와 직결되는 사안에서 외교부가 튀는 불똥을 맞지 않으려는 데만 급급해 아무런 입장을 표하지 않는 게 더 무책임하다는 지적도 있다. 조태용 의원실에 따르면 외교부 스스로 “대부분의 국가 간 조약이 외교부 소관 업무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유권해석은 관례상 외교부가 담당한다”고 밝히고 있다.

조 의원은 “(한ㆍ일 협정 등)국제조약에 대한 유권 해석은 외교부의 업무 영역인데, 이에 따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재판 개입으로 몰아붙이려 한다면 어떻게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외교부도 보다 용기 있게 임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외교부 장관, 더 나아가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지금까지 이어진 외교부의 회피적 태도는 법원이 나서 외교 관계를 걱정하는 이례적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중앙지법은 지난달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을 각하하며 한ㆍ일 관계와 한ㆍ미 동맹에 미칠 악영향을 근거로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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