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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군함 폭탄 4발 피격 진실…간담 서늘했던 러시아 흑해 그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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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현지시간) 유럽 리투아니아의 시아우리아이 공군 기지에서 있었던 일이다. 발트3국(라트비아ㆍ리투아니아ㆍ에스토니아)와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들 나라를 순방 중인 스페인의 페드로 산체스 총리가 이 기지를 찾았다.

[이철재의 밀담]

9일(현지시간) 리투아니아 공군 기지에서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이 연설을 하던 중 스페인의 전투기인 유러파이터가 긴급출격하자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고 있다. Ruptly 유튜브 계정 캡처

9일(현지시간) 리투아니아 공군 기지에서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이 연설을 하던 중 스페인의 전투기인 유러파이터가 긴급출격하자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고 있다. Ruptly 유튜브 계정 캡처

시아우리아이 기지엔 스페인의 전투기인 유러파이터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발트 3국은 전투기를 보유하지 않기 때문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ㆍNATO) 공군이 돌아가면서 지켜주고 있다.

정상회담 중 전투기 출격 생중계 

산체스 총리가 리투아니아의 기타나스나우세다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격납고가 부산해졌다. 조종복을 입은 조종사가 뛰어나와 전투기에 재빨리 올랐다. 정비사는 긴급 점검에 들어갔다.

나우세다 대통령이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장면이 생생하게 TV로 나갔다. 당시 러시아의 전투기인 Su-24가 리투아니아 영공에 가까이 다가오자, 스페인 전투기가 대응하러 출격한 것이었다. 양국 정상의 기자회견은 12분 후 다시 시작했다.

흑해 지도. 러시아로선 흑해가 지중해로 나가는 관문이다. 위키피디아

흑해 지도. 러시아로선 흑해가 지중해로 나가는 관문이다. 위키피디아

요즘 유럽 하늘엔 전운(戰雲)이 잔뜩 끼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나토와 러시아 사이의 군사적 대치가 팽팽하게 이어지고 있다. 리투아니아의 긴급 출격은 현재 유럽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동안 군사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큰 지역으로 한반도와 중동, 남중국해가 꼽혔다. 그런데 이들 지역이 비교적 조용한 데 비해 유럽에선 긴장감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나토 연합 훈련에 태극기도 휘날려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 3국보다 더 심각한 곳이 있다. 흑해다. 흑해는 동남 유럽과 서아시아 사이의 바다다. 그런데 흑해가 끓고 있다. 미국ㆍ나토와 러시아가 치열하게 맞붙면서다. 흑해가 신냉전의 핫스팟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해상 포격훈련 중인 러시아 해군. 러시아 국방부 유튜브 계정 캡처

해상 포격훈련 중인 러시아 해군. 러시아 국방부 유튜브 계정 캡처

발단은 미국ㆍ나토의 해상훈련이다. 미국과 동맹국 등 전 세계 32개국이 참가하는 다국적 해상 훈련인 시 브리즈가 지난달 28일부터 10일까지 흑해에서 열렸다. 병력 5000여 명, 함정 32척, 항공기 40대가 상륙작전, 육상 기동전, 수중침투 작전, 대잠수함전, 수색ㆍ구조 작전 등을 진행했다.

러시아와 영토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목적의 연합 훈련이다. 한국도 초청을 받았지만, 러시아와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해 거절했다. 그런데도 폐막 행사 때 태극기가 걸려있어 외교적 결례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흑해에서 항해 중인 영국 구축함인 디펜더함 상공을 러시아의 전투기인 Su-24 편대가 저공비행하고 있다. 그러자, 디펜더함은 즉각 경계를 강화했다. 방염 두건과 방염 장갑은 전투태세를 내린 뒤 쓴다.  BBC 유튜브 계정 캡처

지난달 23일(현지시간) 흑해에서 항해 중인 영국 구축함인 디펜더함 상공을 러시아의 전투기인 Su-24 편대가 저공비행하고 있다. 그러자, 디펜더함은 즉각 경계를 강화했다. 방염 두건과 방염 장갑은 전투태세를 내린 뒤 쓴다. BBC 유튜브 계정 캡처

전쟁을 부를 수도 있는 도발  

러시아의 반응은 아주 격렬했다. 지난달 23일 러시아가 흑해에서 자국 영해를 침범했다는 영국의 구축함인 디펜더함에 Su-24 편대를 동원해 경고 사격을 한 뒤 폭탄 4발을 떨어뜨렸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이를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의 주장이 맞는다면 전쟁을 부를만한 군사 행동이었다. 이후 미국ㆍ나토는 흑해에 전투함과 군용기를 계속 보냈고, 러시아는 이를 밀착감시하면서 쫓아내려 했다.

러시아는 1일 미국ㆍ나토가 훈련 중인 흑해에서 실탄 사격 훈련을 벌였다. 그러자 미국ㆍ나토는 2일 전투기를 대규모로 투입해 방공 훈련을 치렀다.

8일엔 미 해군이 원정 고속상륙함인 유마함을 흑해에 파견했다. 최대 속도 45노트(약 시속 83㎞)로 항해할 수 있으며, 35노트(약 시속 69㎞)의 속도론 1200해리(약 2222㎞)를 건너갈 수 있는 배다. 흑해 정도의 바다라면 단숨에 1개 중대의 병력을 깊숙이 상륙시킬 전력이다. 러시아는 9일 유마함을 추적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간담이 서늘했을 것으로 보인다.

시브리즈 훈련이 끝난 뒤에도 미국 공군의 정찰기가 연달아 흑해 일대를 비행했다. 러시아의 전투기는 미 정찰기에 바짝 따라붙었다.

러시아의 전투기인 Su-24 편대가 흑해에서 영국의 구축함인 디펜더함을 추적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유튜브 계정 캡처

러시아의 전투기인 Su-24 편대가 흑해에서 영국의 구축함인 디펜더함을 추적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유튜브 계정 캡처

유럽 분쟁 ‘나비효과’ 한국에도 영향

러시아는 왜 흑해에서 이처럼 신경질적으로 행동할까. 러시아 전문가인 윤익중 교수(한림국제학원대학 정치외교학)는 “흑해에서 미국ㆍ나토가 그것도 역대 최대 규모로 훈련을 한다는 것은 러시아를 자극하는 일”이라며 “흑해는 러시아의 턱밑과 같은 곳이다. 러시아는 가급적 완충 지대를 넓게 두려고 하는데, 흑해를 내주면 바로 러시아의 심장부가 나온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흑해를 러시아의 내해(內海)라고 주장한다. 러시아 역사를 전공한 구자정 교수(대전대 역사문화학)는 “러시아는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고 있다”며 “이를 내세워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남진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고 설명했다.

머나먼 흑해가 한국과 한반도의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사소한 변화가 엄청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나비효과’를 넘는 파급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전망이다.

미국 해군의 원정 고속상륙함. 최대 속도 45노트(약 시속 83㎞)로 항해할 수 있다. Austal USA

미국 해군의 원정 고속상륙함. 최대 속도 45노트(약 시속 83㎞)로 항해할 수 있다. Austal USA

중국이 전 세계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다툰다고들 하는데, 아직 중국은 군사력, 특히 핵전력과 외교력에선 러시아에 뒤진다. 옛 냉전 때만큼은 아니지만, 러시아는 아직 미국과 맞붙을 수 있는 나라다. 미ㆍ러 관계는 미ㆍ중 관계의 종속 변수가 아니다. 엄연한 독립 변수다.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다. 유럽에서 러시아와 일촉즉발로 대치하고 있지만, 더 위협적인 중국에 집중하려먼 러시아와 적당히 타협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그렇다면 인도ㆍ태평양에서 국제 질서는 크게 출렁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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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익중 교수는 “한국이 지리적으로, 경제적으로 가까운 중국을 의식해 미ㆍ중 관계만 쳐다본다면 미ㆍ러 관계를 놓칠 수 있다”며 ”미ㆍ러 관계를 면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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