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의 글솜씨 늘리기에 '샌드백'이 됐다는 남자

중앙선데이

입력 2021.07.17 00:21

업데이트 2021.07.17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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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5호 20면

인물의 그림자를 그리다 최정호 지음, 시그마북스
2009년 2월 명동성당.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이 선종 뒤 모셔진 이곳에 대통령이 보낸 화환이 도착했다. 하지만 화환은 곧바로 돌려보내졌다. 김 추기경이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이 장면을, 최고의 정신적 권위가 최고의 세속적 권력에 맞섰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1주기인 2010년 2월에 열린 추모사진전. [중앙포토]

김수환 추기경 선종 1주기인 2010년 2월에 열린 추모사진전. [중앙포토]

저자는 1966년 독일 유학 중 송년 파티에서 한 일본 여성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일제강점기와 일본인에 대한 ‘독설’을 퍼부었단다. 그런데, 그 일본 여성이 오들오들 떨었다. 당시 한국인의 처지가 떠오른다며 말이다. 이후 저자와 그녀는 40여년간 편지를 주고받는다. 여성은 화가이자 수필가·동화작가로 이름을 날린 사노 요코(1938~2010)다. 사노의 필력을 키우는 데, 저자는 ‘샌드백’이 된 셈이다.

김수환, 김준엽, 사노 요코, 박권상 등
세상 떠나도 그림자 남긴 20여 명 그려
강수진·김민기 등 살아있는 이들 헌사도

최정호 교수(오른쪽)는 일본의 화가이자 수필가, 동화작가인 사노 요코(가운데)와 40여년간 편지를 나눴다. 이 편지들은 '친애하는 미스터 최'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사진은 최 교수의 집을 방문한 사노 요코와 당시 그의 남편이었던 시인 다나카와 타로. [중앙포토]

최정호 교수(오른쪽)는 일본의 화가이자 수필가, 동화작가인 사노 요코(가운데)와 40여년간 편지를 나눴다. 이 편지들은 '친애하는 미스터 최'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사진은 최 교수의 집을 방문한 사노 요코와 당시 그의 남편이었던 시인 다나카와 타로. [중앙포토]

저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20여 명의 그림자를 이 책에 그린다. 90세를 바라보기까지, 언론인이자 대학교수로 지내면서 만나고 인연을 맺은 이들이다. 벼슬보다 선비로 살다간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정치 저널리즘을 천직으로 삼은 언론인 박권상, ‘한국 교향곡’을 작곡한 크쉬스토프 펜데르츠키 등…. 이 책 제목의 ‘그림자’는 어두운 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이들의 행적과 귀감이 아직도 드리워져 있다는 의미의 그림자, 즉 잔영(殘影)이다. 그 잔영이 진하다.

김준엽 고려대 총장이 교정에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김준엽 고려대 총장이 교정에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책 뒤편에는 살아 있는 이에 대한 헌사도 있다. 지난해 정범모 전 한림대 총장의 95세 생일 축하연. 저자는 수(壽), 부(富), 귀(貴)를 축사에 담는다. 그러면서 세속적, 물질적인 ‘수’ ‘부’와 달리 ‘귀’는 정신적, 인격적 차원에서도 추구할 수 있는 가치개념이라고 설파한다. 벼슬과 서열을 뜻하는 게 아니라,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언론과 학문이 ‘귀’라는 것이다. 책 앞부분의 김준엽 전 총장을 그리는 부분에도 이 ‘귀’가 등장한다.

최정호 교수는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사진), 김민기 학전 대표 등 살아있는 이들에 대한 헌사도 그린다. 장진영 기자

최정호 교수는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사진), 김민기 학전 대표 등 살아있는 이들에 대한 헌사도 그린다. 장진영 기자

“내가 사람을 알고 있을까.” 저자는 걱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그림자가 왜 진하게 드리워졌나”라고 자문한다. 그들을 쓸 수밖에 없다는, 써야 한다는 고백이다. 책 제목 중 ‘그리다’는 ‘간절히 생각하다’와 ‘글로 나타내다’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저자는 그들을 ‘그리워하며’ 그들의 그림자를 ‘그린다.’ 저자의 원래 의도야 어떻든, 독자는 책을 읽으며 한국 현대사를 문득문득 체감하는 묘미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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