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럽 떠돌던 서른일곱 하루키, 와인은 자유 영혼의 상징

중앙선데이

입력 2021.07.1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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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5호 24면

와글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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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때문인가, 더위 탓인가, 아니면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로 마음이 무거워진 탓일까? 오늘도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더 자고 싶지만 잠은 오지 않고 그렇다고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이른, 애매한 새벽 시간을 가리켜 영어권에서는 ‘스몰 아워즈’(small hours)라 한다. 침대에서 일어나 물 한 잔 마시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을 꺼내 들었다. 소중한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상실감이 그 책을 다시 선택하게 했는지 모른다.

마흔 살이 커다란 전환점이라 생각
정신적 재구성 위해 일본 떠나

“포도주 없으면 저녁 식사 맛없어”
낮엔 글 쓰며 하루 마무리로 한잔
3년에 걸쳐 『상실의 시대』 써 유명

이 소설은 서른일곱 살 주인공이 보잉 747기의 좌석에 앉아 독일 함부르크 공항에 막 착륙하려는 순간 기내에 흐르던 비틀스의 음악 ‘노르웨이의 숲’을 듣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터져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노래는 주인공이 사랑하던 여성 나오코가 가장 좋아하던 곡이며, 소설의 원제목도 ‘노르웨이의 숲’이다. 주인공에게 그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나오코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곡을 들으면 난 가끔 무척 슬퍼질 때가 있어. 왜 그런지 모르지만 깊은 숲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해. 외롭고 춥고 어둡고, 아무도 도와주러 오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내가 신청하지 않으면 레이코 언니는 이 곡을 연주하지 않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중앙포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중앙포토]

원제목과 달리 이 소설에서 노르웨이라는 장소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비틀스의 노래에서 ‘Norgwegian Wood’는 ‘노르웨이 숲’이 아니라 ‘노르웨이산(産) 목재’를 뜻하기에 번역을 잘못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영어책을 자주 번역하는 하루키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 노래의 가사 ‘그리고 깨어났을 때 나는 혼자였다’에서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던 것 같다. 숲은 깊은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들이 미로를 헤맨다는 하나의 메타포였으니까.

요양원에서 만난 선배 레이코는 나오코를 위해 기타를 칠 때마다 와인을 마신다. 나오코의 마지막 순간 그리고 주인공과 레이코가 둘이서 나오코의 장례식을 조촐하게 거행하는 동안에도 와인은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와인은 하나의 의식(儀式)이며 리추얼이다. “내가 컵을 가지고 오자 레이코는 거기에 가득히 와인을 채워 정원의 석등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툇마루 기둥에 기대어 기타를 안은 채 담배를 피웠다.”

다른 작품에 맥주나 위스키가 보이던 것과 달리 『상실의 시대』에 와인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가 이 소설을 썼던 공간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스 미케네섬의 한 빌라에서 쓰기 시작해 시칠리아로 옮겨 계속 쓰다가 로마 교외의 아파트 호텔에서 완성했다고 하는데, 유럽의 지중해 문화권에서 와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이 소설이 탄생했던 3년 동안의 남유럽 체류 경험을 여행기 『먼 북소리』에서 상세히 털어놓았다.

그때만 해도 그는 유명 작가가 아니어서 싸구려 숙소를 전전하며 카페 테이블이나 공원 그늘 같은 곳에서 로마의 문구점에서 산 싸구려 대학노트 위에 볼펜으로 소설을 썼는데, 그때 옆에 있었던 것이 와인이다. 와인은 자유영혼의 상징이었다. 낮에는 글을 쓰다가 베란다에 나와 해 저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시는 포도주 한잔의 맛을 하루키는 종종 예찬하고 있다. “와인이 없는 저녁 식사가 얼마나 맛없는가는, 그리스에 와 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하루키는 로도스섬 같은 지중해의 섬에서 생선구이 식당에 갈 때는 반드시 휴대용 간장을 지참했다. 막 구워낸 생선이나 오징어에 레몬을 짜 듬뿍 뿌린 뒤 그 간장을 살짝 끼얹으면 그야말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라고 귀띔을 한다. 그가 특히 극찬한 곳은 와인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키안티 지방. “포도주도 요리도 불평의 여지가 없을 만큼 맛있다. 포도주를 이 종류 저 종류 다양하게 그리고 일괄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도 토스카나에 잘 가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는 왜 아직 가난한 작가의 신분으로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 3년 동안 남유럽을 돌아다녔던 것일까? 그는 마흔 살이라는 나이를 인생에서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라 생각했고 이를 위해 ‘정신적인 재구성’을 원했다고 한다.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만난 것도 하루키와 같은 서른일곱 살 때, 독일의 대학 기숙사에서였다. 당시 나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강렬한 힘에 이끌려 직장에 1년 동안 무급휴직을 신청하고 베를린에서 하루하루 모순된 일상과 힘겹게 대결하고 있었다. 마흔 살을 앞두고 혹독한 마음의 열병을 앓고 있었으며 하루키의 표현대로 하자면 일종의 ‘정신적 재구성’이 간절했던 시기였다. 바로 그때 『상실의 시대』를 비롯한 하루키의 소설들을 만나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그가 강조한 것처럼, “모든 일에는 ‘물때’라는 게 있고, 그 물때는 한번 상실되면 많은 경우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고 나도 믿고 있었다.

3년 동안 일본을 떠나 남유럽을 이동하면서 썼던 소설 『상실의 시대』는 하루키에게 세계적인 작가라는 명성과 초대형 베스트셀러의 부를 동시에 안겨 주었다. 반면 1년 동안 서울과 직장을 떠나 베를린을 다녀온 뒤 나는 마흔이 되기 이전 책의 저자가 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이뤘고 다른 길도 함께 열렸다. 남들에게는 무모해 보이던 도전이 글을 쓰고 강연하는 ‘글로생활자’로서의 마음 근육을 단단하게 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하루키의 말처럼 나는 지금 나만이 쓸 수 있는 책을 쓰면서 힘든 시기를 버텨 내고 있다. 『먼 북소리』에서 하루키가 했던 말이 지금 내 심정이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은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떤 한 시기에 달성돼야 할 것이 달성되지 못한 채 그 시기가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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