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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깨 걷는 몽유병, 스트레스 없애고 잠 충분히 재워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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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5호 27면

[아이 마음 다이어리] 몽유병과 야경증

아이 마음 다이어리 일러스트

아이 마음 다이어리 일러스트

유치원생 민주는 매우 평범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엄마 손을 잡고 들어온 아이는 처음에는 약간 긴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료실 안의 풍경을 신기한 듯 둘러봤다.

학습지 등 하느라 늦게 잠자리 들면 #놀라 잠 깨는 야경증까지 올 수도 #수면 중 안구 움직임 빠른 ‘렘’ 거쳐 #비렘수면 땐 성장호르몬 등 분비 #침대보다 방바닥에 재우는 게 안전

“민주가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는구나?” 나는 아이의 이름과 나이를 확인한 후 부드럽게 물었다. “네 맞아요. 언니가 다니는 학교에 들어갈 거예요.” 민주의 대답이 꽤 야무졌다. 표정도 밝았다. 처음에는 민주와 부모가 왜 병원을 찾았는지 의아했으나 초진 설문지(아이가 밤마다 일어나서 거실을 돌아다닙니다.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합니다. 아침에는 간밤에 돌아다닌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에 적힌 내용을 보고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민주가 언제부터 이랬나요?” 나는 민주 부모에게 물었다.

“약 두 달 전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 무렵 학교 입학준비를 시키느라 한글과 수학 학습지를 시작했는데 그 이후부터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올해는 영어유치원으로 옮겼습니다.”

4~8세 10~30% 몽유병, 남아가 더 많아

“아, 그랬군요. 민주가 최근에 바빠지기 시작했네요.”

“근데 이제 학교 들어가야 하는데 다들 그 정도는 시키지 않나요?” 엄마는 생각이 많아지신 듯 혼잣말처럼 반문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빙긋이 웃기만 했다.

“아이가 잠든 후 대략 얼마나 지나서 일어나 돌아다니나요?” 내가 민주 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10시쯤 자면 자정 무렵에 일어나 돌아다녀요. 한 5분 정도 돌아다니다가 다시 잠자리로 들어갑니다.”

“돌아다니는 민주한테 부모님이 말을 걸면 반응을 합니까?”

“아뇨. ‘민주야 왜 일어났어? 화장실 가고 싶어?’라고 말을 걸어도 아무 대꾸가 없고 아이가 눈은 뜨고 있는데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엄마는 어젯밤에도 민주가 돌아다녔다면서 생생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침에 아이한테 너 어젯밤에 돌아다녔다고 말하면 ‘내가 그랬어? 정말?’ 이러면서 믿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말해요. 어느 날은 제가 밤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찍은 영상을 보여 줬더니 아이가 갑자기 막 울더군요. 자기 기억상실증 걸린 거냐고, 큰 병 걸린 거냐고 하면서요.” 엄마는 민주에게 동영상을 보여 준 것을 후회하며 울컥하셨다.

“민주야, 무슨 큰 병 걸린 거 아니야. 걱정할 필요 없어. 좋아질 거야.” 나는 아이를 안심시킨 후 소아신경과에 뇌파 검사와 수면다원검사를 의뢰했다.

민주는 몽유병으로 진단받았다. 수면 중 비렘수면 단계에서 불완전하게 깨어나는 일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공식적으로는 ‘비렘 수면각성장애’라고 불린다. 비렘 수면각성장애로는 몽유병과 야경증(자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놀라서 깨는 일이 반복적임)이 대표적이다.〈표 참조〉

비렘 수면각성장애의 DSM-5 진단 기준

A 잠에서 불완전하게 깨어나는 삽화가 반복적으로 있다.
● 몽유병: 자다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삽화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 야경증: 자다가 갑자기 놀라서 깨어나는 삽화가 반복적으로 있다.
B 꿈 형상을 전혀 혹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C  삽화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
D 삽화는 사회적, 직업적 혹은 다른 기억의 중요한 영역에서 임상적으로 유의한 고통을 야기한다.
E 장애는 물질 등의 생리적 효과에 기인하지 않는다.
F 동반되는 의학적, 정신적 장애가 몽유병이나 야경증의 삽화를 더 잘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의 수면은 주기를 가지고 있고 크게 렘(REM) 수면과 비렘(Non-REM) 수면으로 나뉜다. 렘(REM)이란 용어는 ‘빠른 안구의 움직임 (Rapid Eye Movement)의 약어로서 미국 시카고 의대 생리학자이자 수면 전문가인 나다니엘 클라이트만 교수가 1953년 ‘사이언스’지에 처음 발표했다. 클라이트만 교수는 렘수면에서는 안구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반면 비렘수면에서는 안구 움직임 거의 없으며, 이러한 수면의 주기가 약 90분 간격으로 반복되는 것을 관찰했다. 비렘수면은 전체 수면의 약 80%를 차지하고 신체적인 회복에 필요하다. 렘수면에서는 꿈을 꾸고 정신의 피로를 회복한다. 비렘수면 동안 낮에 쌓인 피로를 해소하고 상처와 뇌세포를 재생하며 성장호르몬도 분비된다. 렘수면 동안 뇌는 낮에 일어났던 일을 복습하고 활성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비렘수면은 다시 4단계로 나뉘는데 1~2단계는 얕은 수면이고 3~4단계는 수면 서파(델타 수면)가 발생하는 깊은 수면이다. 몽유병과 야경증은 바로 비렘수면 중 깊은 수면단계에서 나타나고 아침에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따라서 두 증상이 공존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단, 수면 시간이 짧은 낮잠 동안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들은 병리적인 뇌 기능의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중추신경계의 활성으로 인해 비렘수면과 렘수면 상태가 교란되어 생긴다고 알려져 있다. 만 4~8세 일반 아동의 10~30%에서 경험할 정도로 흔하고 여아보다 남아에서 많이 나타난다.

몽유병과 야경증의 원인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가족-유전적 소인이 관여한다고 본다. 즉, 형제나 부모 중에 몽유병이나 야경증을 앓았던 사람이 있다면 이를 경험할 확률이 10배 정도 높아진다고 한다. 또한 신경계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의학적 질환이나, 수면 박탈, 정신적 스트레스에 의해 발생하기도 한다. 사례 속 민주의 경우 학교 입학을 앞두고 학습량이 늘어 피곤함이 쌓이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아지면서 몽유병이 나타났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아이들의 경우 수면이 충분하지 못하면 전전두엽 피질의 기능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수면량이 줄어들면 뇌로 전달되는 포도당 공급이 줄어드는데 전전두엽 피질은 뇌의 부위 중에서도 포도당을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전전두엽 피질은 문제를 해결하고 의사를 결정하며 감정을 조절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등 여러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이 기능이 부족해지면 집중력과 행동 조절 능력에 문제가 생겨 산만하고 공격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도 있다.

쳉(Cheng) 등은 2020년 1만1000명의 9~11세 아동들을 대상으로 수면 시간과 정신건강 사이의 상관성을 조사했다. 수면 시간이 7시간 이하인 아이들이 9시간 이상 충분히 자는 아이들에 비해 문제행동이 53% 이상 높았던 반면 인지 기능은 7.8% 낮은 것을 관찰했다. 이처럼 충분한 수면은 아이들의 정신건강과 인지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연령에 따른 평균 수면시간은 6세는 11시간, 9세는 10시간, 13세는 9시간, 16세는 8시간이다.

부모·형제가 앓았다면 발병률 10배 높아

민주는 평소 밤 9시쯤이면 잠자리에 들었으나 입학준비를 하면서 10시 이후에 잠이 드는 경우가 많았고 영어유치원 스쿨버스를 타야 해서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는 민주가 영어유치원도 재미있게 다니고 학습지도 열심히 해서 스트레스가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진료실에서도 민주는 겉모습은 꽤 씩씩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그러나 민주와 상담을 거듭하고 여러 평가를 진행한 결과, 민주는 또래 애들보다 불안 성향이 다소 높았고 성취 욕구가 많아 뭐든지 완벽하게 다 잘 해내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대부분의 유소아기의 몽유병 치료는 특별한 치료가 필요하지 않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적으로 사라진다. 수면을 잘 취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수면 중 돌아다니다가 깨지기 쉬운 물건 위로 넘어지거나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등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낙상을 예방하기 위해 침대보다는 방바닥에 재우는 것이 좋다. 아울러 과도한 초콜릿 섭취는 비렘수면을 촉진하므로 삼가는 것이 좋다. 야경증 역시 불규칙한 수면 시간표와 수면 환경만 교정해 줘도 저절로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 즉, 규칙적이고 충분한 수면이 치료의 핵심인 것이다.

민주는 영어유치원을 그만두었고 저녁 늦게 학습지를 하던 것을 낮 동안 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했다. 덕분에 10시간 이상의 충분한 수면시간을 확보하게 됐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민주는 더는 병원을 찾지 않는다. 아마 저절로 좋아졌으리라 믿는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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