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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대선에 정신 팔린 국회…'방위비 협정' 역대 최장 공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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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가 지난 4월 국회에 제출한 11차 한ㆍ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의 비준 동의안이 논의의 첫발도 떼지 못한 채 3개월 넘게 국회에 계류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양국 간 협상 난항으로 이미 시한을 1년 3개월이나 넘긴 올 3월 겨우 타결이 됐는데, 국회 비준마저 늘어지면서 협정 공백 기간이 역대 최장 기록을 경신하게 됐다.

지난 4월 8일 최종건 외교부 1차관과 로버트 랩슨 주한미국대사 대리가 제11차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 합의문에 정식 서명하는 모습. 외교부.

지난 4월 8일 최종건 외교부 1차관과 로버트 랩슨 주한미국대사 대리가 제11차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 합의문에 정식 서명하는 모습. 외교부.

95일째 계류…역대 최장 기록 경신 

한ㆍ미는 지난 3월 7일 11차 SMA에 합의했고, 정부는 4월 13일 국회에 비준 동의안을 제출했다. 앞선 SMA 선례를 고려할 때 늦어도 6월 정도에는 국회 비준 절차가 마무리되고 협정이 발효할 수 있을 것이란 게 당초 한ㆍ미 당국의 예상이었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 시절 5배에 달하는 무리한 방위비 증액 요구로 공전을 거듭하던 협상이 바이든 행정부 출범 46일 만에 전격 합의에 이르자 정부는 "강력한 한·미 동맹의 복원 신호"라며 크게 반겼다.

4월에 국회 제출...95일째 무소식 #11차 협정, 역대 '최장 계류 기간' 경신 #대선 국면서 방치...여야 기싸움도

그런데 엉뚱하게 국회에서 발목이 잡히는 모양새다. 아직 소관 상임위인 외교통일위원회에 비준안이 상정된 적도 없다. 국회 처리를 위한 첫발도 떼지 못한 것이다.
16일을 기준으로 비준안은 95일째 계류 상태로, 이미 역대 SMA 중 최장 계류 기간을 경신했다.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 국회 계류 기간.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 국회 계류 기간.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공청회 둘러싼 여야 잡음? 

여야 관계자의 입장을 종합해보면, 비준이 지연되는 이유 중 하나는 공청회 개최 여부를 둘러싼 신경전이다.
여당은 이번 방위비 협정에서 한ㆍ미가 국방비 인상률에 맞춰 방위비를 큰 폭으로 늘리기로 합의한 데다가, 5년 이상의 다년 협정인만큼 공청회가 꼭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재정 부담이 급격히 커질 수 있기 때문에 국회 비준 전에 관련 정부 당국자, 전문가, 시민 단체를 불러 의견을 듣자는 취지다. 앞서 8ㆍ9ㆍ10차 협정 비준 때 공청회가 열린 전례도 있다.

이에 야당 일각에선 "국회법에 따르면 비준안은 공청회를 꼭 거칠 필요가 없다"는 반박이 나왔다. 또 진술인 섭외 등 공청회 준비로 시간만 끌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여당이 협정에 반대하는 시민 단체의 영향력을 의식해 불필요한 공청회를 요구한다는 불만도 있었다.

그럼에도 정부가 제출한 비준안에 대해 여당이 먼저 공청회를 요청하는 마당에 굳이 야당이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지만, 그 사이 3개월이 지났다. 현재 여야는 다음달 초중순 공청회를 열기로 잠정 합의한 상황이다.

지난 3월 18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정은보 외교부 한ㆍ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 대사와 로버트 랩슨 주한 미국대사 대리가 한ㆍ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가서명식을 마치고 합의문을 들어 보이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3월 18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정은보 외교부 한ㆍ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 대사와 로버트 랩슨 주한 미국대사 대리가 한ㆍ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가서명식을 마치고 합의문을 들어 보이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대선 국면서 직무 유기"…美 관계자 "답답하다" 

정치권에선 사상 초유의 비준 지연 사태가 벌어진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국회가 일찌감치 '대선 모드'로 전환하며, SMA을 중요한 현안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여야를 막론하고 비준의 시급성을 제기하는 목소리를 찾아보기 어렵고, 신속한 처리를 위해 노력하자는 분위기 자체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

거기에 추경 등 다른 현안에 밀려 한ㆍ미 동맹의 근간이 되는 협정의 비준을 사실상 방치하는 모양새가 됐다.

또 외통위원장이었던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5월 당 대표에 선출되면서 위원장이 공석이 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후임이 올 때까지 안건 처리를 유보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국회에는 민주당 의원들이 당직을 맡으면서 공석이 된 상임위원장 자리들을 두고 여야 간 기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윤호중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 비워진 법사위원장 자리가 핵심인데, 법사위를 여야 중 어느 쪽이 가져갈지 결론이 나야 외통위원장 문제도 해결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를 두고 지난 5월 한ㆍ미 정상회담 등을 계기로 여야가 앞다투어 동맹 강화를 외쳐 놓고, 정작 주어진 의무는 방기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방위비 협정 상황에 밝은 외교 소식통은 "미 측은 '방위비 협정이 국회 공청회를 거쳐 조만간 발효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예상과 달리 기약 없이 비준이 늘어지고 있으니, 답답함을 토로하는 미 당국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미국도 일단은 한국 국내 절차를 주시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지난해 4월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 정문 앞에서 전국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회원들이 강제 무급휴직 규탄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한ㆍ미는 지난 3월 11차 방위비 협정으로 협정 공백시 전년도 수준의 인건비 지급을 명문화해 무급휴직 가능성을 차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뉴스1.

지난해 4월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 정문 앞에서 전국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회원들이 강제 무급휴직 규탄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한ㆍ미는 지난 3월 11차 방위비 협정으로 협정 공백시 전년도 수준의 인건비 지급을 명문화해 무급휴직 가능성을 차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뉴스1.

한국인 근로자 인건비 '돌려막기'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주한미군 소속 한국인 근로자의 인건비 문제다. 15일 국방부에 따르면, 올해 들어 정부는 지난 4월 1일자로 1668억원에 이어 6월 1일자로 1965억원을 인건비 명목으로 미측에 선지급했다. 원래 한국이 내는 방위비에서 나갔어야 하는 돈이지만 국회 비준이 늦어지며 사실상 정부 재정으로 이를 먼저 지급했다.

여야는 SMA 비준이 빨라도 다음 달쯤 돼야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국방부는 다음 달 1일 자로 또 인건비 1372억원을 추가로 선지급한다는 계획을 세워둔 상황이다. 실제 지급이 이뤄지면 올해 미측에 선지급한 인건비만 세 차례에 걸쳐 5005억원이 된다.
정부 당국자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솔직히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인건비를 지급하며 꾸려가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고충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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